"떠날 땐 일주일이더니 돌아오는 데 50년"

[슬라이드] 사할린 강제징용 조선인 1세대 김동선의 삶

등록 2007.09.19 14:48수정 2007.09.27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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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만약에 화태(사할린)에 징용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하신 적 없으세요."
"인생에 만약이란 기 있나. 그런 거는 생각도 안 해봤어. 그마 이리 한 세상 흘러가는 기지."


김동선 할아버지(87)의 지나간 삶을 듣다가 궁금해졌다. 만약 스무살에 사할린으로 징용가지 않고 고향에서 농사짓고 장가들고 자식낳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만약은 없다"고 하셨다.

갖은 풍파 다 겪은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래 테이프처럼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오, 화투패처럼 다시 물릴 수도 없는 것이니 이제 '지나가버린' 고생스러웠던 한 인생일 뿐이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인생관이었다.

경북 고령 대창양로원을 찾아 김동선 할아버지와 같이 지낸 지난 14·15일은 비가 유난히 많이 내렸다.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일과는 3층 맨 구석에 있는 자신의 숙소와 1층 식당, 그리고 간간히 3층에 있는 휴게실을 찾는 것 뿐이었다.

식사 시간이 다 될 무렵 "밥 먹으러 가야지요" 한 마디 하실 뿐 옆자리에 딱 붙어다녀도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묻는 이야기에만 기억을 되살려 띄엄띄엄 답을 주실 뿐이었다.

그런데 그 띄엄띄엄 들려주는 기억 가운데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부분은 징용에 끌려가는 날부터 해방되기 전 힘들게 일했던 3년간이었다.

"징용 갈 때는 화태가 어딘지도 몰랐지. 배운 게 없었으니. 당시에 미국이랑 싸우는 것도 몰랐어. 그냥 가자는 대로 갔지. 면에서 나와 이태(2년)만 일하고 오면 된다고 했어. 그래 부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하관(시모노세키)에 내려서 다시 기차타고 북해도로 가서 다시 배 타고 화태까지 갔어. 딱 일주일 걸렸는데 잠 제대로 잔 건 하루 뿐이었지.


그리고 가자마자 탄광에 들어가서 일했지. 건강은 타고나선지 계속 탄 캐는 일만 했어. 사할린에 살면서도 딱 한번 발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일 밖에 없었으니…. 그리 끌려간 기 모두 다 조선이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

"화태 갈 땐 일주일 밖에 안 걸렸는데, 돌아오는데는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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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거창에서 78명이 징용된 후, 1957년 1월 1일 촬영한 사할린에 남게 된 일부의 가족사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수집한 자료사진이다. ⓒ www.gangje.go.kr



스물한살 청년 김동선이 "이태(2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42년 경남 울산 농소면에서 일주일 동안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도착한 곳은 당시 '화태'라 불린 사할린의 나이부치 탄광이었다.

김동선은 그 곳에서 매일 12시간씩 석탄을 캤다. 나이부치 탄광은 일본의 카라후토 주식회사 소유였으며, 이 회사는 조선 징용자들이 캐낸 석탄을 이용해 전투기에 사용할 항공유를 만들었다. 김동선을 비롯해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 징용자 4만여명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위한 소모품일 뿐이었다.

조선 청년 김동선은 일본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후 사할린에서 물러날 때까지 나이부치 탄광에서 탄부로 일했다. 그러나 약속했던 2년이 지나 해방되는 해까지 3년 동안 막장에서 일했던 임금은 받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어떻게든 선편을 구해 고국으로 가려했던 노력도 헛수고로 끝나고 결국 해방 후에도 50년 동안 꿈에서 조차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해방 후 도착한 연락선은 일본인을 데려가기 위한 것이었지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위한 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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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하 조선인이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남사할린 지도. ⓒ 조경국


언젠가는 고국으로 데려다 줄거라 믿고 기다렸던 배는 결국 오지 않았고 1950년대 일본이 사할린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자국민을 철수시킬 때에도 조선인들은 귀향길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경우는 1946년 12월에 성립된 '소련지역에서의 철수에 대한 미소협정'에 의하여 29만2600여명이, 그리고 1956년 10월 19일의 '소일공동선언'에 의해 일본인 부인과 그 동반자 조선인 및 아이들까지 2300여명이 철수할 수 있었다. 이후 개별적으로 귀향길에 오른 450여명까지 포함할 경우 1945년 8월까지 가라후토에 거주했던 약 30만명의 일본인은 거의 전원이 철수 할 수 있었다."-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314쪽

일본인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자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던 사할린 조선인들도 귀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국적'이었던 조선인 징용자를 포기했고 미국도 이를 용인했다. 소련은 사할린 개발에 조선인의 노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정작 이들을 데려와야할 조국은 해방 후 혼란-분단-전쟁-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져 징용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고향 가기 위해 무국적자로 버틴 35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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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가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지급했던 국채저금통장. 사할린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대부분은 김동선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 일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 www.gangje.go.kr


해방을 맞이했던  1945년부터 1980년까지 김동선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소련인도 아닌 무국적자로 살았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부터 영구귀국한 1994년 4월까지는 어쩔 수 없이 소련 국적으로 살았다.

그 사이에 사할린 강제징용 조선인의 귀향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해방된 조국조차 이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길고긴 '이산(離散)'이었다.

김동선이 고향을 떠나 사할린까지 가는 것은 딱 7일이 걸렸을 뿐이지만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진 50년이 걸렸다. 얼추 날짜로 계산하면 2만일이 걸린 셈이다.

사할린으로 끌려갔던 스무살 청년 김동선이 일흔 노구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련 여권과 대한민국 여권 그리고 몇 벌의 옷가지, 사할린에서 사용하던 오래된 보온 물병이 전부였다.

부모와 형제들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중국으로 징용갔던 동생은 현재 울산에 생존해 있다)였으며, 평화로운 시골이었던 고향은 공장이 즐비한 공업도시가 되었다. 김동선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와 처지가 비슷한 영주귀국 사할린 1세대와 함께 경북 고령의 대창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할린 1세대 영주귀국자를 위해 세워진 대창양로원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는 모두 40명이며, 이들 중 80세 이상이 19명이다. 1994년 45명이 영주귀국한 이래 지금까지 130여명이 이 곳에 머물렀다.

사할린1세대는 고향에서도 여전히 이산

사할린 한인 동포 영주귀국 사업 어디까지 왔나
사할린에서 살고 있는 한인 동포는 강제이주 1세대와 후손을 포함해 약 4만30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대부분은 넉넉치 못한 형편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정부가 한인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벌인 것은 지난 1992년부터. 지금까지 국내에 정착한 사할린 동포 1세대는 약 1600여명에 이르고, 오는 10월에도 600여명의 1세대 동포들이 영주귀국할 예정이다.

이미 영주귀국한 1세대들은 강제 징용 등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배상한 것이 아닌 일본 적십자사의 지원금을 받아 건립된 안산 고향마을과 인천 삼산동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고, 일부는 김동선 할아버지처럼 대창양로원 등 노인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영주귀국 사업 초기에는 독신으로 지냈던 1세대만 귀국이 허용돼 러시아에서 가정을 꾸렸던 많은 한인들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2005년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대상자를 광복 이전 출생자와 그 배우자, 2·3세 비속(卑屬)까지 포함하는 사할린 한인지원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러시아와의 외교마찰 등의 이유로 법안 통과가 흐지부지된 상태다.

노구를 이끌고 왔던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이산의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육신은 해외동포를 위한 묘역인 천안 망향의 동산에 묻혔으되 넋만은 해방 전 그들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남사할린섬) 징용 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
- <사할린 아리랑>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50년이 지난 고향은 생경한 곳으로 변해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알고 맞이해 줄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았다. 사할린에서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고 불렀던 아리랑은 결국 고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산(離散)은 한 개인의 선택과는 상관없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국땅에서 느껴야 했던 이산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사할린 #강제징용 #김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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