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리들도 군자금 헌납에 앞장서대표적인 한국관리인 이재곤, 김가진, 민영휘 등은 일본군자금을 헌납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을사오적' 이지용 등 1급 친일파와 친일단체도 납부당시 한국정부의 고위 관리들도 일본군 군자금 헌납에 앞장섰다. 1904년 8월 10일에 찬정 김가진(金嘉鎭)이 100원, 주일대사와 학부 협찬에 있던 고영희(高永喜)가 50원, 민상호(閔商鎬)가 100원, 민영소(閔泳韶)가 100원, 궁내부 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이 100원, 이재곤(李載?)이 50원, 예식원 부장 민영린(閔泳璘)이 50원, 육군 부장 이인영(李寅榮)이 50원, 장례원 김종한(金宗漢)이 50원 등을 육군 군자금으로 헌납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훈장과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이다.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농상공부대신 김가진은 1904년 4월 1일 의정부참정 조병식(趙秉式)에게 "러일전쟁을 위해 평양 이북 지방에서 일본군에 협조할 수 있도록 관원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후에 남작을 수여받았다. 또한 법부대신 고영희는 훈1등 욱일대수장과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후에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외부대신 임시서리 겸 육군참장 이지용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장본인이며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혔다. 왕족 출신인 이재완은 일본보빙대사로 활약하다가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과 후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또 민영린은 훈2등 서보장(瑞寶章)과 백작을 받았고, 이재곤과 민상호는 남작, 민영소는 자작을 수여받았다.
군자금 헌납자에는 특히 경찰쪽 관리들이 많았는데, 1904년 11월에 박기호(朴淇昊, 경무관), 유진세(劉鎭世)를 비롯한 총순(總巡), 권임, 순검 등 36명이 49원을 육해군 혈병비로 원산 일본영사관에 납부했다. 1904년 10월 당시 순검의 월급이 15원 정도였으니 이들이 낸 금액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박기호는 뒤에 1905년 함남 고원군수를 지냈고, 유진세는 뒤에 1908년 원산경찰서 경부, 1910~13년 함남 삼수군수, 1928~37년까지 전남 무안 삼양면장을 지냈다.
각 지방 군수도 헌납 대열에 앞장섰다. 1905년 6월에 평양군수 이승재(李承載, 10원), 평양개시장 감리서 주사 심원명(沈遠明, 10원)·김훈(金薰, 10원) 등이 일본군자금을 헌납했다. 15원을 군자금에 헌납한 백낙삼(白樂三) 선천군수(1904~06년)는 군수 재직시 일본군 철도 부설에 참여하여 일본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심지어 1908년 일본훈장(勳六等旭日章)을 패용할 수 있도록 관보에 게재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일진회 등 친일적 단체들의 수장들도 부지런히 회원들의 돈을 걷어 헌납했다. 1904년 12월 19일 일진회의 전신인 진보회 함경도 지회장인 한남규(韓南奎), 부지회장 유창일(柳昌一)·백사원(白士元) 등이 200원을 육해군 혈병금으로 냈다.
한남규는 1906년 함남 명천군수, 1907년 함남 관찰사, 1907년 의병전쟁 당시 선유사로 의병토벌에 앞장섰으며, 1908년 일본으로부터 명치훈장 훈7등 서보장을 받기도 하였다. 병탄 이후에는 1919년 함남 도참사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일진회 출신의 관찰사로 일본연호 명치(明治)를 사용했다 하여 세간에 친일파로 익히 알려져 있었다. 유창일은 일진회 통영지회장으로 러일전쟁 당시 참전하여 일본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29년 2월 11일 일본 건국절(기원절)을 맞아 통영신사에서 참배하고, 통영경찰서 연무장에서 재향군인 통영분회 정기총회 석상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또한 한남규를 비롯한 함경남북도·강원도 진보회 회원 3588명이 339원 73전, 원산 출신 최명신(崔明信) 외 56명도 38원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1905년 7월 5일 원산 출신 사태균(史泰均) 상업회의소장도 25원을 육군혈병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죽음에 대해 "이토공은 한국을 위해 밤낮 진력(盡力)하였을 뿐 아니라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에 있었으므로 내가 가장 경의를 표해야 할 사람인데 이번과 같은 흉변(兇變,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한 사건)을 보았으니 한국 장래를 위해 크게 걱정이 된다"라고 애석해 마지않았다.
계란까지 군자금으로 낸 한국인개전 초기인 1904년 3월 6일 평양의 유지들은 계란까지 일본군에게 바쳤다. 평양의 대표적 유지인 황갑영(黃甲永)은 오리 깃털 2포대와 계란 200개, 장용건(張用鍵)은 계란 300개와 난국주 3되, 팽한주(彭翰周) 평양 군수는 생우(生牛) 1두 및 조선소주 200병, 윤일성(尹日性)은 닭털 10포대 등을 헌납했다.
팽한주는 1904년 평양군수로 재직당시 탐학과 횡포로 면직되었을 때, 일본 공사 하야시(林勸助)가 "일본 군대가 서쪽 지방으로 들어갈 때 팽한주의 공로가 크므로 그를 파직하지 말라"고 요청하여 복직되기도 했다. 그 뒤 팽한주는 러일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8월 10일 일본국으로부터 훈6등 욱일장을 받았다.
한편 1905년 1월 3일 개성의 부인회는 혈병금을 모집하여 466원을 헌납하였고, 5월 3일 평양일어학교 황원영(黃遠永), 정두현(鄭斗鉉, 1919년 숭덕학교 교감) 등 5명의 학생들이 82원 등을 일본군 군자금으로 냈다. 또한 1904년 5월 진남포 보동학교 오대규(吳大圭) 외 20명이 육군 혈병금을 냈다. 이처럼 일본군의 군자금 헌납운동에는 학생들까지도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