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건국을 위한 과정을 그리고 있는 <대조영>
KBS
드라마 <대조영>(연출 김종선 극본 장영철)은 최근 발해 건국을 눈앞에 두고 있던 7세기 후반을 그리고 있다. 백성 수십만을 데리고 요동(遼東)을 떠난 대조영(최수종 분)이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모산(東牟山)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를 당나라의 대총관이 된 이해고(정보석 분)가 대군을 이끌고 뒤쫓는 상황이다.
그러나 요동을 버리고 동모산으로 떠나는 대조영의 모습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요동은 고구려의 변방이었지만 고구려 방어선의 한축이었고 천혜의 요새가 즐비한 곳이기 때문이다. 대조영은 왜 그런 요동을 버리고 험한 여정을 택한 것일까?
성(城)의 나라 고구려앞서 말했듯이 요동 지역은 수많은 철옹성이 버티고 있는 고구려의 요충지였다. 고구려는 '성의 나라'라고 불렸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성들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성이 있었던 것일까?
고구려에서 성은 사람을 살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전시에 기병들의 휴식공간이었다고 한다. 요동에는 그 성들 중 상당수가 밀집돼 있었다. 중국이나 다른 북방 이민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전쟁 다발지역이기 때문이다. 요동을 비롯한 지금의 만주 일대에는 어림잡아 100여개의 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이렇게 성이 많기 때문에 외적이 침입한다 하더라도 고구려의 요동 지역은 난공불락(難功不落)이었다. 하나의 성을 공략했다 하더라도 주변 성에 포위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전쟁에 패한 역사 기록이 거의 없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도 이 방어선을 뚫는 데는 실패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 왕조는 무너졌지만 만주 일대의 꽤 많은 성들은 독립적인 상태로 남아있기도 하였다. 이 부분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발해의 초기 수도, 동모산그럼 이렇게 훌륭한 방어력을 갖춘 요동 지역을 포기하면서까지 선택한 동모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동모산의 위치는 현재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 부근의 성산자산(城山子山)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 뒤 이곳에 성을 쌓고 발해 최초의 도읍지로 삼아 '구국(舊國)'이라 칭하였다.
동모산으로 추정되는 성산자산은 해발 600m 정도의 비교적 낮은 산으로, 평야지대 안에 외따로이 솟아 있다. 그 중턱에 있는 산성은 길이가 2km 정도로 돌과 흙으로 쌓았다. 성벽 높이는 1.5~2.5m이고, 밑변의 너비는 5~7m 정도이다. 이것으로만 보아도 요동 지역에 있는 요동성(遼東城)이나 안시성(安市城)의 방어력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곳이다.
더욱이 요동을 떠나 동모산으로 이동하는 여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군사들만 움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거란 등의 수십 만 유민과 함께였기 때문에 행군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대조영이 백성들을 최대한 배려하고자 추운 겨울을 피하기는 했으나, 만주 지역은 워낙 추운 곳이었기에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나라의 대군에게 추월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발해의 건국을 위해 그리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피를 흘려야 했다. 발해의 사료가 부족한 탓에 정확히 그 피해 상황을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드라마에서 그리고 있는 것보다 결코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드라마 <대조영>은 이 부분에서 대조영의 의제인 흑수돌과 돌궐족의 추장인 계필사문의 죽음을 그린 바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몇 주요 인물들이 죽음을 맞을 것으로 예고되었다. 이 중에는 가공인물도 있지만 실제로 그 같은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이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대조영 일행이 무사히 동모산으로 들어가 발해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대조영이 요동을 버린 이유대조영은 요동 지역의 방어력을 포기하고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동모산으로의 이동을 강행하였다. 그런 행보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역사적인 정황으로 볼 때 몇 가지 근거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