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권한의 '학생회의'가 있는 경남 거창고

선거도 정치도 거창고만큼만 하라

등록 2007.12.07 10:02수정 2007.12.0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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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고등학교
거창고등학교거창고등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하다는 서울 강남의 학부모들 사이에 수년 전부터 수상한 소문이 돌았다. 학원도 없고 과외조차 받지 못하는 환경에 있는 지방의 한 고등학교가 부모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는 서울 8학군의 고등학교를 제치고 서울대와 연·고대에 더 많은 합격생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도시의 학생들이 학원이다 과외다 보충수업이다 입시에 매달리는 시간에 이들은 농사일을 배우고, 가축을 키우며, 토끼몰이에 눈싸움, 심지어는 야영과 예술제까지 대학입시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과목 외 활동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지난 12월 4일 UCC와 시민기자에 관련된 강의를 위해 경남 거창고를 찾았다. 평소에 거창고등학교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풀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우리 학교(경남 거창고등학교) 출신들이 사회에 나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등의 소식을 전해 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축하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현수막을 건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공부를 잘해서 고시에 합격한 아이들이나 농사일을 잘 배워 농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나 또 출신지역에서 장사하는 아이들이나 모두 똑같이 성공한 제자이기 때문이지요."

거창고 김선봉 교장은 공부 잘하는 학생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누군가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사람'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또 거창고는 모든 학생이 자기 능력만큼 공부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목표라며 선언적 교육보다는 실천적 교육에 주력하고 있다고 거창고와 자신의 교육철학을 강조했다.

 강의를 듣기 위해 강당에 모인 거창고 학생들
강의를 듣기 위해 강당에 모인 거창고 학생들김혜원

거창고등학교 '직업선택의 10계'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 강당에는 유명한 '직업선택의 10계'라는 액자가 걸려있다. 거창고의 설립자인 전영창 선생님의 정신과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직업선택 10계명은 낮은 곳으로 임하며 개척과 봉사 희생으로 살아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요즘과 같은 물질 만능, 성공제일주의시대에 한 번쯤 되새겨 볼만한 따끔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이 유명하고도 유별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과연 어떨까. 강의를 마치고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고3 학생들을 만나 보았다.


"우리 학교가 유명하긴 하지요. 밖에서는 유명대학 합격률이 높은 학교라고 소문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자랑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학생회의가 있다는 것이에요."

"맞아요. 학교에서 열리는 학생들의 모든 행사를 학생회의에서 주관하거든요. 예산편성부터 집행, 행사진행에서 감사까지 학생들이 스스로 하구요. 운동회라면 심판까지도 학생들이 직접 하지요. 선생님이라고 해서 행사에 마구잡이로 끼어들지는 못하십니다. 그 정도로 거창고등학교의 학생회의는 그 권한이 강력하구요. 그런 만큼 행사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학생들도 최선을 다 합니다.”


학생들의 말 속에서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학생회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선생님들조차 학생회의의 결정에는 절대 따라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니 막말과 고성, 몸싸움으로 얼룩진 우리나라 국회의 국회의원들에게 거창고등학교 학생회의 진행을 녹화해 보여주고 싶다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복도에 마련된 대선 후보별 공약에 스티커를 붙이는 학생들
복도에 마련된 대선 후보별 공약에 스티커를 붙이는 학생들김혜원

학생들과 함께 교실을 돌아보다 복도 벽에 붙어 있는 설문지가 눈에 들어온다. 대선에 나온 각 후보의 공약을 나열해 놓고 가상 투표를 하는 중이었다. 후보의 이름을 잘라낸 것이 독특했다. 오직 공약만을 보고 투표하라는 뜻이다.

"수능 전엔 시험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갖지 못했지만 시험이 끝나서 조금씩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너무 아닌 것 같은 것이 많아요. 노선도 정책도 다른 사람들이 오직 당선만을 위해 이리저리 마구 몰려다니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아요. 기회주의자 같잖아요."

"함께 정치를 하는 사람끼리, 그리고 적어도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끼리 지나치게 서로의 약점만 꼬집어내니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얼마나 타격이 클까 싶어요. 자신의 정책이나 비전을 말하기보다는 남의 흉보기 바쁘고… 네거티브 선거는 정말 보기 흉한 것 같아요."

"어떤 후보는 처음 정치를 하려고 나왔을 땐 굉장히 참신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치인들은 특히 초심을 잃고 부정이나 비리에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한숨을 푹푹 쉬시면서 가스값이 너무 올라서 살기가 어렵다고 하시더라구요. 대통령은 서민의 눈물을 닦아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데 보이지 않는 곳 소외된 곳에 관심을 갖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치가 너무 상업적으로 가는 것 같아요. 인터넷을 하고 있어도 수시로 대선홍보물이 뜨는 통에 얼마나 귀찮은지 몰라요. 그런 걸 보면 정말 표를 얻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하는구나 싶구요. 어떤 후보는 거짓말도 밥 먹듯 하구요. 선거판을 지켜보면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른들의 나쁜 면을 보게 되었어요. 좀 실망이지요."

취재에 응해 주었던 고3 학생들  윗줄 왼쪽부터 오보람 박종주 유미현, 아랫줄 왼쪽부터 김우현 장보화 이재익.
취재에 응해 주었던 고3 학생들 윗줄 왼쪽부터 오보람 박종주 유미현, 아랫줄 왼쪽부터 김우현 장보화 이재익.김혜원

"12명씩이나 되는 후보나 나오다 보니 누가 돼도 국민 전체의 동의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표가 분산되잖아요. 단일화를 한다는 소리도 있지만 몇 일전까지 서로 헐뜯고 흉보던 사람들이 어떻게 합치겠다는 것인지… 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전 올해 선거권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어요. 투표는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만일 지금 저에게 선거권이 있다면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거든요. 얼마 전에 만난 선배도 그러더라구요. 처음 행사하는 투표권인데 선거나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구요. 무조건 투표만 하라고 하지 말고 후보나 정책에 대해 좀 더 쉽게 설명해주고 이해시켜주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공약이나 정책들이 너무 어려워서 읽어봐도 모를만한 내용이 대부분이거든요."

아직은 투표권이 없는 탓에 정치나 선거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다며 쉽게 의견을 말하지 못하던 친구들이 일단 말문이 트이니 어른들의 정치 토론 못지않은 격론을 토해낸다.

대선후보자들의 이합집산이나 네거티브 선거전, 거듭되는 말 바꾸기와 거짓말 등에 대해서 어른들보다 더 호되고 날카로운 비판의 말을 쏟아 내기도 했다. 배울 것 없는 못난 선거판을 보여 준 어른으로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정의감과 시대정신이 살아있는 건강한 청소년들을 만난 기쁨으로 명치끝이 저려오는 전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학생들과의 대화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대선후보에게 바라는 것이나 다음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학생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모교인 거창고등학교를 도시지역 학교 못지않은 시설로 발전시켜 달라는 주문을 한다.

 밝은 저들의 표정속에서 희망을 봅니다
밝은 저들의 표정속에서 희망을 봅니다김혜원

"거창고등학교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는 너무나 훌륭하지만 하드웨어가 굉장히 낡았거든요. 지난해 불이 났던 여학생 기숙사는 수리했는데도 비가 새요. 부모님 떠나 기숙사 생활하는 것도 슬픈데 비 오는 날 천정에서 비까지 뚝뚝 떨어져 봐요. 얼마나 우울한지 몰라요."

"샤워하다가 물이 안 나온 적도 많아요. 수압이 약해서 여러 명이 함께 물을 쓰면 물살이 약해지거든요. 머리감다 온수 끊기고… 하하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고 지나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될 거라지만 그래도 막상 겪어보면 너무 불편해요."

"체육관 하나 지어주시면 좋겠어요. 1950년대에 설립된 학교인데 아직도 체육관이 하나 없다니 말이 안 되죠. 저희처럼 한창 뛰어야 할 청소년들이 비가 오면 교실에 들어앉아서 체육 시간을 보내야하니…. 저희도 비 오는 날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싶어요."

거창고등학교의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고 오는 길. 우리 교육의 앞길을 밝힐 희망이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공교육의 위기, 교실의 붕괴, 학교의 학원화…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며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어두운 교육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거창고등학교와 같은 교육의 등불이 아직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남 거창고등학교 #대선 #대안학교 #자립형 사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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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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