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경찰이야. 풀오버(pull over: 차를 한쪽으로 대는 것) 해야 돼.”
포트 리퍼블릭 로드에서 네프 애비뉴로 좌회전했을 때 자동차 뒤로 뭔가 번쩍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저게 뭐지?’ 차 안의 룸미러를 보고 있는데 조수석에 앉은 큰딸이 말했다. 경찰이라고.
“뭐, 뭐라고? 경찰이라고?”
지난 해 11월 2일 금요일. 두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마지막 풋볼 홈경기가 열렸다. 이 날은 마침 홈커밍 데이여서 다른 날보다 경기가 늦게 끝났는데 나는 마칭밴드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오느라 거의 네 시간을 추위에 떨고 있어야 했다.
밤 11시가 다 된 늦은 시각. 내리막길인 포트 리퍼블릭 로드를 내려오는데 파란 신호등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를 다 내려와 네프 애비뉴로 좌회전을 하려고 할 때 신호등은 노란불로 바뀌었다.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것인지 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늦은 밤, 내리막길, 추위에 떨었던 몸,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등 갖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에이, 그냥 가자.'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가볍게 좌회전을 했는데…. 아뿔싸, 그만 경찰차가 순식간에 따라 붙은 것이었다. 번쩍거리는 경광등과 함께 내 차를 바짝 좇아오고 있는 경찰. 온 몸이 다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으악~
“엄마, 빨리 옆으로 대.”
“어떡하니, 노란불이었는데…. 노란불 맞지? 나, 지금 걸린 거니? 어떡하지?.”
“어떡하긴? 그냥 딱 걸린 거지. 엄마, 나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 경찰이 옆에 올 때까지.”
미국에서는 경찰에 걸리면 경찰이 다가올 때까지 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수상한 행동을 취해서도 안 된다는 얘길 누누이 들었던 터라 불안한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떡하니"만 연발하면서.
“아니, 딱지를 뗄 거면 빨리 와서 뗄 일이지 왜 이리 지체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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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에게 떼인 A4 크기의 코트 소환장. 말하자면 딱지인 셈이다. ⓒ 한나영
▲ 경찰에게 떼인 A4 크기의 코트 소환장. 말하자면 딱지인 셈이다.
ⓒ 한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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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다가오지 않는 경찰을 원망하며 큰소리로 짜증을 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아마 경찰은 붙잡힌 차에 대해 차적을 조회하고 무슨 위험한 일이 없는지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하이, 제가 파란불에서 노란불로 바뀔 때 좌회전을 했는데요. 뭐가 잘못 됐나요?”
“버지니아 주에서는 노란불에서도 무조건 정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돌았을 때는 빨간불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아닌데요. 노란불이었는데요. 제 아이들도 다 봤는데요.”
“운전면허증과 차량등록증 좀 보여주시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설명을 했지만 경찰은 결국 딱지를 건넸다. 으윽. 그렇게 딱지를 떼인 뒤 나와 경찰 사이에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오늘 풋볼 홈 경기 마지막 날이거든요. 마침 제 아이들이 마칭 밴드에 있어서 저도 오랫동안 밖에 있느라 추위에 떨었는데요. 그리고….”
“오, 그래요? 아이들이 뭘 하는데요?”
“컬러가드랑 퍼커션이요.”
“저도 학교 다닐 때 드럼라인에 있었는데, 따님은 무슨 악기를 하죠?”
“베이스 드럼이요.”
“아, 그래요. 반가워요. 나는 테너 드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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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애들이 마칭밴드에 있다고요." ⓒ 한나영
▲ "우리 애들이 마칭밴드에 있다고요."
ⓒ 한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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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좋게 생긴 경찰관은 차 안을 들여다보며 두 딸에게 아는 체를 하며 인사도 건넸다. 사실 이런 쓸데없는(?) 얘기는 딱지를 떼이기 전에 했어야 했다고 아는 사람들은 말했다. 미국 경찰도 때로 인정에 호소하면 봐주기도 한다며…. 하지만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어쨌거나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딱지를 떼였다. 어떻게 하는 거냐고 경찰에게 물으니 벌금을 물든가 코트(법정)에 나가든가 둘 중에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벌금이 얼마죠?”
“그건 전화해서 알아보세요.”
다음 날 경찰서로 전화를 해보니 161불이라고 했다. “뭐, 뭐라고? 161불?” 15만원 정도 되는 큰 돈이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처음 딱지를 떼였으니 코트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가서 얘길 잘 하면 깎아 주기도 하니까 한 번 가 봐요. 경험이니까.”
결국 코트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야 할 날이 마침 학교 강의가 있는 날이어서 연기를 해야 했다. 교통 관련 코트는 몰아서 한 달에 한 번씩만 열린다고 했다. 그래서 잡힌 날이 바로 한 달 뒤인 2008년 1월 2일. 새해 이튿날.
새해를 맞자마자 코트부터 가야 한다는 게 사실은 기분 나쁘고 찜찜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데. 결국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런 색다른 경험도 나중에는 추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순진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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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랜드주에 있는 베이 브리지 근처에서 바라본 2008년 첫 일출. ⓒ 한나영
▲ 매릴랜드주에 있는 베이 브리지 근처에서 바라본 2008년 첫 일출.
ⓒ 한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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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슨버그 코트 ⓒ 한나영
▲ 해리슨버그 코트
ⓒ 한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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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 관련 재판은 이곳 '지역 코트'에서 이루어진다. 코트가 모여 있는 이 거리의 이름은 '코트 스퀘어'. ⓒ 한나영
▲ 교통 관련 재판은 이곳 '지역 코트'에서 이루어진다. 코트가 모여 있는 이 거리의 이름은 '코트 스퀘어'.
ⓒ 한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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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D- day. 전날까지만 해도 법정에 서게 된 엄마를 불쌍히 여겨 함께 갈 것처럼 얘기하던 아이들도 겨울방학의 단잠을 핑계로 나를 외면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던 지난 2일 아침 8시 반. 해리슨버그 코트로 향했다. 무거운 마음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철딱서니(?) 없게도 이번 사건도 <오마이뉴스> 기사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 흥분이 일기도 했다. 못말리는 시민기자? 우아하게(?) 커피를 들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긴 토트백의 여인, 코트 입구에 당당히 섰다.
"액체는 반입이 안 되는데요."
"그래요? 몰랐어요. 그럼 여기 두고 갈게요."
새해 이튿날이어서인지 재판 받으러 온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All rise! (모두 기립하시오)”
‘이혼법정’과 같은 법정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많이 들었던 표현이 귓전을 때렸다. '아, 여기가 바로 미국 법정!' 맨 앞에 앉은 근엄한 판사와 옆의 서기, 제복을 입고 나온 경찰 넷, 양복을 입은 변호사, 자리에 앉은 피곤한 표정의 피고인들. 조용한 코트 안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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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코트. ⓒ 한나영
▲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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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판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게 딱지를 건넨 경찰과 내가 판사 앞에 섰다. 오른손을 들고 진실만 말하겠다는 선서를 한 다음 옆에 선 경찰이 나의 교통법규 위반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서 오다가 그만 빨간불에 갔다"고. 경찰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판사가 내게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준비한 말을 쏟아냈다.
나: “빨간불에 간 게 아니예요. 포트 리퍼블릭 로드는 내리막길인데(판사도 고개를 끄덕끄덕), 마침 그 날은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풋볼 홈커밍 데이가 있던 날이었어요. 날이 몹시 추웠는데 경기가 끝난 뒤 마칭 밴드에 있던 두 딸을 (준비해 간 마칭밴드 사진을 내보이며) 태우고 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는데요.”
판사: “흠, 딸들이 예쁘군요.”
나: “그날 밤 10시 50분, 포트 리퍼블릭 로드의 신호는 노란불이었어요. 밖에 오래 있어서 추위에 떨었던 나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네프 애비뉴로 좌회전을 했어요. 노란불에 정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어요.”
판사: “벌금 25불. (땅땅!)”
싱겁게 끝났다. 벌금은 25불로 감해졌다. 하지만 코트비용 61불을 더해 86불을 내야 했다. 사실 이것도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트에 가지 않았으면 161불을 내야 했던 걸 생각하면 그나마 75불을 절약한 셈이었다.
순진한 생각으로 미국 법정에 서 봤다. 하지만 코트라는 곳이 그렇듯 가볼 만한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날 위로해 주는 미국 친구의 말처럼 그 경찰관은 정말 심심했던 것일까.
"나영, 네가 운이 나빴던 거야. 그 밤중에 노란불 내리막길에서 좌회전 하는 널 잡은 걸 보면 말이야. 그곳은 오히려 정지하는 게 더 위험할 때도 많은 곳이야. 그래서 사고도 잘 나고. 아마 경찰이 심심했던 모양이야.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
2008.01.08 17:38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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