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달 28일 오전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경제인 간담회에서 조석래 전경련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등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정체성을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좌파'란 기존의 가치나 전통보다 새로운 변화와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을 이야기한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쟁을 확대함으로써 효율성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좌파는 대체로 자본주의의 여러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하려는 입장인데 반해,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적 가치 성장을 추구하는 편이라 이 두 가지 가치는 모순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그래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그의 정체성 혼란을 상징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차기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은 무엇이라 볼 수 있을까? 정부조직과 공무원 수를 줄이고, 기업의 자유로운 경쟁과 투자를 중시하는 '친기업정부'를 내세우는 것을 보면 명실상부한 '신자유주의 정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 '신자유주의 정부'는 오로지 자율만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져오리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시장 자유를 향한 애덤 스미스의 경계와 불신20세기 후반 복지 정책을 추진한 나라들이 장기 불황에 빠져들며 경제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신자유주의는 이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하였다.
'신자유주의'란 단어에서 보듯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적 양상으로 발전해왔던 19세기 자본주의 경향과 유사한 점이 많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근원도 1776년에 출간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이 책에서 시장을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내버려두라고 주장하였다. 즉 개인은 오직 자신의 이득을 추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사회적 이익)을 증진시키게 되는데, 애덤 스미스는 사회 전체에 부를 증가시키는 것이 바로 이 '자유'라고 보았다.
하지만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자유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2007년 1월 22일 EBS 지식채널e '국부론 1권 제11장' 참조)
그는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면서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몇몇 개인의 자유 행사는 정부 법률로 제한되어야 한다" "구성원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또한 당시의 신흥자본가 계급에 대해서도 "이 계급이 제안하는 상업적 법률, 규제 등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져야 하며,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후 채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익은 공공의 이익과 결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고 그들의 '자유'를 경계했다.
심지어는 "도저히 인류의 지도자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대화는 소비대중을 배반하거나 가격인상을 담합하는 데서 끝난다"라며 극도의 불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회 전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자유는 법률로 제한되어야 한다"<국부론>에 등장하는 신흥자본가계급을 다시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의 상황에 대비하면 어떤 계급이 될 수 있을까? 바로 대기업이나 거대자본 등이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
외환은행과 관련한 론스타라는 거대자본의 투기적 행태를 보면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경계가 정확히 그 곳에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로운 시장이 될수록 공정한 경쟁과 공공의 이익이 더욱 강조되어야 함을 자유주의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가 이미 강조했던 셈이다.
그런데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어설픈 신자유주의들이 공공의 가치를 짓밟고 있는 듯 하다.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후 폐지, 기업 정기세무조사 대폭 감축, 상속세 단계적 인하, 이것들은 이명박 당선인의 뜻에 따라 대통령직 인수위가 추진하고 있는 사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