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아래에서 위로 쳐다본 망부석. 비탈이 심하고 나무가 많아 사진에는 크고 높은 망부석의 절반도 채 잡히지 않았다. 사진은 경주 망부석인데 350m 가량 더 가면 울산 망부석이 있고, 다시 100m를 가면 박제상의 아내와 딸이 떠 마시며 연명했다는 샘(참새미, 일명 망부천)이 있다.
정만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망부석은 치술령에 있다. 치술령이 유명한 것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부전가요(不傳歌謠, 가사가 전해지지 않는 노래)에 '치술령곡'이 있다는 것을 배운 까닭이다. 또 신라 때 왕의 동생을 구하러 일본에 갔다가 죽은 충신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마침내 절명하면서 돌이 되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치술령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때문이다.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는가 싶어 동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 기다렸다니 치술령은 경주와 울산 사이에 있을 게 틀림없다. 대한민국정부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 원장은 그 산의 높이가 766m라는 사실을 묻는 이 없어도 언제나 친절하게 확인해준다. 국립지리원은 치술령 정상에 그 지점이 높이 766m, 동경 129˚15′23′′, 북위 35˚39′17′′라는 사실을 적시한 삼각점 표석을 세워두었다(2002년 10월).
고구려 장수왕을 만나 자신이 섬기는 신라 왕의 아우 복호를 볼모에서 풀어달라고 하여 성사시킨 박제상, 그는 뛰어난 외교관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잡혀 있는 왕의 또 다른 아우 미사흔도 구해오라는 왕명을 받고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율포(울산)로 간다.
박제상 자신이 눌지왕에게 "고구려는 나라도 크고 왕도 자비하여 일이 쉽게 성사되었으나 왜는 그렇지 않으므로 자신이 반란을 일으켜 왜로 도망친 것처럼 계책을 써서 왜왕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것과 쫓아온 아내에게 "살아서 만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스스로 말한 데서 분명히 확인되는 것처럼, 그는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와 딸의 얼굴을 잠시 보는 일조차 팽개치고 곧장 배를 타고 동해로 들어가 버린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몸은 돌이 되고 혼은 새가 될 너무나 사랑스럽고 애통한 아내와 딸들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이는 김유신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귀가 하지 않고 다시 다른 전쟁터로 가면서 재매정(김유신 집 안의 우물)의 물 한 바가지를 떠오라고 해서 들이키고는 "물맛은 변함이 없구나"하고 간 것과도 다르다. 김유신은 어지간해서는 죽음의 길이 아니었지만, 박제상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면서 그러했으니. 만고충신의 자세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다정다감하지는 못한 사내의 면모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