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싱글시대 11

대학에 입학하고 2년간

등록 2008.01.26 16:17수정 2008.01.2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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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명세를 내민 여자

 

여자를 사귀지 못했던 1981년 한 해가 지나가고 1982년, 나는 S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S예술대학을 지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꼭 배워 보고 싶은 교수가 계시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미인 여대생들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나는 S예대 학보사 기자 시험에 떨어진 뒤 S예대 방송국 성우 시험을 봐 합격하였습니다. S예대 방송국에는 문예창작과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거의가 방송연예과 학생들이었습니다.

 

나는 직접 각본을 쓰고 성우를 하는 식으로 한 프로그램을 맡았습니다. 시낭송과 더불어 시인의 작품세계와 삶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송연예과 여학생과 함께 진행을 하는 프로그램을 맡기도 했습니다. 내 목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는 학우들이 많아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학보에 60매짜리 단편소설을 응모하였는데 그것이 실렸습니다. 200자 원고지 한 장당 원고료가 1000원씩이었으니 6만 원이라는 거금을 원고료로 받았습니다. 등록금이 30만 원대였으니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죠. 그 원고료로 문예창작과 동기생들에게 술을 양껏 샀던 걸로 기억합니다.

 

문예창작과에는, 지금은 유명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성민경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참 특별한 여자였습니다. 아니, 영리한 여자였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시라도 자신이야말로 인물감이라는 생각을 놓고 있던 적이 없었고, 성민경은 대학 시절 내내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었으니까요.

 

성민경이 나에게 처음 사랑의 눈빛을 보내온 것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수업이 끝났을 때 그녀가 불쑥 말했습니다.

“문욱씨, 우리집 된장찌개 맛이 그만이에요. 제가 초대할 게 한번 먹으러 오지 않을래요?”
충청북도 억양이 배어 있는 느리고 구수한 목소리였습니다.

“집이 어딘데요?”
“충주에요. 충청북도 충주.”
“그럼… 지금 거기서 통학을 하고 있단 말인가요?”
나는 그렇게 능청을 떨 줄 아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유, 그게 아니라요. 우리집은 충주지만 나는 지금 신사동에 있는 오빠집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강남 신사? 강북 신사?”
“강남에도 신사동이 있나요?”
“예.”
“강북 신사.”
“된장찌개를 신사동으로 먹으러 가야 하나요?”
“음… 그것도 좋고… 아님, 방학 때 시골로 저랑 같이 내려가는 것도 좋고요.”
“아무튼 초대해 주어서 고맙군요. 그런데 왜 나를 선택했나요?”
“참 편안하고 재미있는 남자인 것 같아서요.”

 

성민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들어왔으므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입학한 나보다는 2년 연하였습니다. 그래서 수업이 있을 때마다 한 강의실에서 만나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민경이 다른 여학생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나를 부를 때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문욱씨‘라고 부르는 점이었습니다. 나를 이성(異性) 상대로 상각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문학 동료로 생각해서였을까요?

 

하루는 성민경이 나에게 커피를 한잔 하자고 했습니다. 남녀간이기는 했지만 커피 한잔 사주고 얻어 마시는 일은 클래스 메이트 간에 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커피를 두 세 모금 마셨을 때 그녀가 불쑥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이건 뭐지? 신청곡인가?”
“아니에요. 아무말 말고 문욱씨 어머니한테 갖다 드리세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메모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엉뚱하게도 그녀의 간략한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습니다. 생년월일에서부터 된장찌개를 잘 끓인다는 것까지, 말하자면 청혼(請婚)을 한 셈이었습니다.

 

“나의 어떤 점이 좋은데?”
"강력한 라이벌이란 점이에요.“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나는 입학하자마자 투고한 단편소설 원고가 학보에 실렸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그녀는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서정적 문체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소설가가 되기 위한 험난한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지만, 시(詩)를 잘 쓴다는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는 달리 나는 그녀에게서 특별한 이성(異性)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이 두 사람이 합쳐질 수 없는 커다란 문제점이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소설가가 돼야 하잖아.”
“그렇죠.”
“그렇다면 둘이 결혼해선 안 돼.”
“왜 그렇죠?”
“좋은 소설을 쓰려면 몸이 건강해야 하잖아. 그러므로 여자 소설가는 의사와 결혼해야 하고, 남자 소설가는 간호사와 결혼해야 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메모지를 돌려주었습니다.

2008.01.26 16:17ⓒ 2008 OhmyNews
#싱글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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