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그래서 행복하다

겨울 철새들은 제 몸의 힘으로 수만리를 날아 간다

등록 2008.02.05 15:24수정 2008.02.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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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질이 급하고 겁이 많아서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70대 후반인 지금까지 많이 걸었다. 가장 많이 의지하고 사는 아내와 함께 몸도 마음도 건강하니, 자식들에게 별 부담이 되지 않는다.

 

많이 걸어다닌 가장 큰 원인은 차가 없어서다. 나에게 내 차가 있었다면 많이 못 걸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 차가 없는 것, 은근히 원하던 별장이 없는 것이, 나를 건강하게 했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물길 따라 난 길을 걸었다. 서울의 한강 남쪽, 북쪽의 자전거-산책로를 다 걸었다. 김포대교에서 팔당대교까지 45km가 넘는다. 한강 본류로 흘러드는 중랑천을 의정부에서부터 걸었고, 안양천도 한강에서 안양읍까지 걸었다. 탄천도 한강에서 분당까지 걸었다. 양수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청평, 가평, 춘천, 화천 파로호, 양구까지도 물길따라 걸었다. 물가에 길이 없으면 물에서 가까운 차도나 인도를 걸었다. 한강의 여러 다리도 일부러 걸어서 건넜다.

 

물길은 사람길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았다. 사람길(차도나 인도)은 반드시 물길따라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문 글자, 법 법자는 물이 가는 것을 뜻한다는 깊은 뜻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땅길(인도, 차도)은 물길(강, 바다), 불길(햇볕), 하늘길(공기)의 지배를 받는다.

 

강화도 동쪽의 역사 유적지의 길, 석모도, 교동도의 한적한 길, 김포,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등 휴전선 일대의 길도 걸으며 동족상쟁의 상처에 가슴 아파했다. 화천읍에서 해산터널도 걸어서 통과하고 평화의 땜까지 걸었다. 소양호와 파로호 사이에 있는 사명산(1198.6m) 둘레의 길고 긴 임도는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갈 수 없는 환상적인 길이었다.

 

높은 산을 오르기가 힘든 나이가 되어서는 임도를 많이 걸었다. 연천, 가평, 강촌, 춘천, 화천의 서쪽, 북쪽의 임도는 거의 다 걸었다. 딸기, 오디, 다래를 따먹으며 쑥도 뜯었다.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았다. 자연의 아름다운 기운이 나의 몸과 영혼에 저절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여름에는 골짜기 물에 몸을 담그며, 산 짐승처럼 즐거워했다.

 

겨울에는 주로 강원도 철원의 바다처럼 넓은 들길을 걸었다. 수로가 잘 나 있고, 10km도 넘는 포장된 농로는 우리 부부가 걷기에 너무도 즐거운 길이었다. 콘크리트 숲속에서만 지내다가 이렇게 시원한 들판에 와서 걸으니 가슴이 확 트였다. 차가 안 다니니 마음이 편하고 도시에서의 긴장은 다 사라진다.

 

하늘에는 수 백, 수 천 마리의 기러기가 군무를 즐기며, 동서남북 마음대로 날아다닌다. 한적한 논배미에서는 학(두루미)들이 새끼들을 데리고 여유있게 먹이를 쪼고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한 곳에서 한 나절이 넘게 느릿느릿 지낸다. 그러다가 어미들이 새끼들을 데리고 하늘 높이 까맣게 올라가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보인다. 아마도 봄이 되면 번식지인 시베리야로 날아갈 연습을 새끼들에게 시키는가 보다.

 

기러기나 두루미들은 제가 먹은 먹이의 힘으로 수만 리를 날아간다, 석유 한 방울 태우지 않고, 제 생명의 힘으로 날아 가는 것이다. 또 별장은커녕 변변한 집도 없다. 사람들도 제 몸의 힘으로 저 멀리 유럽이나 남미까지도 갈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자동차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다.

 

그전에 나도 별장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새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달라졌다. 별장이 있다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 새로운 곳에 가기 어렵고, 또 나에게는 그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어 부담이 컸으리라.

 

호화 별장을 여러 채 가진 재벌 총수들이 사람들의 눈총을 맞으며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불려 나오는 것을 본다. 사람들이 적당하게 가난한 것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2008년 2월 3일 일요일. 오늘은 오랫만에 가평군 북면 용수목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도마치고개를 넘어, 화천군 사창리까지 14km의 2차선 포장된 차도를 걸을 계획이다. 중학생 시절, 수학여행을 떠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났다.

 

김밥 세 줄을 사고, 귤 5개, 더운 물 보온병을 담은 배낭을 메고, 7시 17분 성북역 발 기차를 탔다. 일요일인데도 영하의 날씨라 좌석은 반도 더 비었다. 대성리 가까이부터 동쪽창 밖으로 보이는 강 건너의 눈 덮인 늠름한 산줄기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어느덧 8시 26분 가평역에 내렸다. 버스 대합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니, 추위도 풀리고 기분이 상쾌하다.

 

9시 정각에 용수목 행 버스를 탔다. 서울 근교 경기도에서는 제일 긴 계곡 물-가평천은 총 36km인데, 처음엔 도마치고개에서 발원한 도마천으로 시작하여 가평천으로 이어진다. 흘러가다가 석룡천, 명지천, 홍적천, 백둔천 등의 골짜기 물과 합수하여 북한강으로 들어간다.

 

버스는 석룡산(1147m) 화악산(1468m), 촉대봉(1167m) 줄기와 국망봉(1168m), 명지산(1267m), 연인산(1068m) 사이로 난 꼬불꼬불 계곡 길을 50여 분 달려서 용수목에 도착했다. 계곡 양편의 설경은 내 마음을 그윽한 동양화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했다.

 

명지산과 석룡산 등산객이 한 명씩이고 도마치고개를 걸어서 넘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다. 이 길은 아내와 둘이서, 친구들과 여럿이 10여 차례 걸었었다. 조무락 골짜기 입구 38도 선 위치를 지나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무주채폭포에 왔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무주채폭포 입구에 닿았다. 새벽 5시 반에 밥을 먹어 속이 출출하다. 마치 농산물 판매대라고 만든 정자가 있어 앉았다. 김밥 한 줄을 먹고, 따뜻한 물을 마시니, 기운이 나는 듯하다. 후식으로 귤 한 개를 더 먹었다.

 

사람들은 기름지고 비싼 음식과 술을 즐겨 먹는다. 나는 땅기운으로 된 김밥과 약수를 데운 물과 따뜻한 햇볕과 맑고 깨끗한 공기(바람)를 마시면 족하다. 나이 들수록 소식을 하고 채소와 과일이 몸에 좋다 하여, 그대로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

 

길 가에는 이름 모를 산새들이 포르륵 포르륵 날다가, 가지에 앉아서 꽁지를 깝짝거리는 것이 너무 귀엽다. 참나무, 자작나무, 낙엽송들은 잎을 다 떨구고, 파아란 하늘과 맞닿은 능선에서 조용히 봄을 기다리고 있다. 소나무, 잣나무는 추위를 이기고 푸른 빛을 간직하며 나에게 무슨 교훈이라도 주는 것 같다.

 

길 오른 쪽에 천주교도 피신처 성지가 있다. 일제시대 징용이나 보국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여 여기에 와서 신앙공동체 마을을 이루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신앙인들은 숯도 굽고, 경춘선 철도에 쓸 목재도 벌목했다 한다.

 

한 시간쯤 더 걸으니까, 승용차 한 대가 선다. 나이 지긋한 분이 "할아버지! 타고 가시죠?" 한다. 혼자서 걷는 게 좀 힘들어 보였나? 늙은이에 대한 예의가 고마우나 나는 더 걷고 싶어, 고맙다고 하면서 사절하였다. 내 발바닥이 땅바닥 기운을 더 받아야 기운이 노익장 하겠다는 생각이다.

 

차는 한 시간에 서 너 대가 빠른 속력으로 지나간다. 이렇게 좋은 곳을 저렇게 빨리 달려 가야 하는 차 안의 사람들이 불행하게 보인다. 나이 들어 자가용 차가 없었다면, 저이들도 나같이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의 기운과 충분히 교감하면서, 인생사에 대하여 이것저것 생각을 반추하면서,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텐데….

 

용수목에서 출발하여 세 시간이 다 되어 어느덧 도마치고개에 이르렀다. 여기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지대로 해발 600m 높이다. 8km를 걸어 와서 이제는 내리막 길이다. 걸어오면서 좀 더 천천히 걷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평생을 남보다 앞서 가겠다고 허둥대며 살아온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북동 쪽으로 멀리 빼어난 화악산의 정상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려갔다. 눈이 듬성듬성 덮인 겹겹이 뻗어간 산들은 아무리 쳐다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한 시간 반을 걸어 사창리 광덕초등학교 앞 정류소에 도착했다. 걸은 시간은 4시간 25분, 거리는 14km. 혼자서 이 길을 걸었다는 성취감!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광덕고개를 넘어 가는 버스를 타고 포천 이동면 도평터미널에서 의정부 행 버스를 갈아탔다. 광덕고개를 넘고, 이동면, 일동면을 지나며 동쪽에 남북으로 기운차게 뻗어내린 한북정맥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산들이 올해에도 5월이 되면, 나보고 놀러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올해에는 예전에 갔던 곳, 또 새로운 곳을 찾아 내 몸과 영혼에 더 착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채우리라고 다짐한다.

2008.02.05 15:24ⓒ 2008 OhmyNews
#겨울 철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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