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도 세금을 내 국민의 의무를 다한다. 왜 목회자는 예외가 되어야 하나(자료사진).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래도 나는 목회자 전체적으로 보면 상위층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에는(불과 2년 전까지) 교단관련 헌금과 십일조, 의료보험 등을 납부하고 대략 80여만원으로 5인 가족이 살았다. 물론 그 때는 제공된 사택이 있었기에 서울생활보다는 훨씬 풍족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사례비를 받고 생활하고 있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반면 수억의 연봉을 받는 목회자들도 있다. 교회의 양적인 크기에 따라 교인수에 따라 달라진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에사도 한참 벗어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지체'라고 고백하면서도 오늘의 한국 교회는 지극히 개(個)교회주의적이며, 개인구원 중심과 양적인 성장과 기복신앙에 기초해 있다.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신실한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학위와 언변과 처세술이 오늘 날 대형교회들에 넘치고 있고, 교인들의 자발적 요구와 목사들의 개인적인 욕심(그들은 '사명감'이라고 무장을 한다)으로 인해 찢어지게 가난한 교회의 목사들은 안중에도 없다. 가끔 동냥주듯 적선을 하고는 선교했다고 자랑하는 현실이다.
세금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옆으로 간 것 같지만 내 생각으로는 가난한 교회 목사들도 세금을 내는데(세금을 내나 안 내나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부자 목사들은 당연히 세금을 내야하지 않겠는가?
이유? 이 나라 국민이니까. 뭐가 그렇게 복잡한가? 복잡할 이유 하나도 없다.
세금을 내면 노동자라구? 노동자가 어때서?지난 금요일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세금문제로 논쟁을 하던 중, 세금납부 반대를 하는 어느 목사가 세금을 내면 목회자도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악성 루머면 좋겠다.
예수도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는가? 목수 예수, 노동자 예수.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데 노동을 능멸하는 말을 하고, 노동자들을 욕되게 하는 망발을 한다는 말인가?
결국 목회자들의 세금납부에 대해 불을 켜고 반대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사례비를 받는 목사들이 아니라 대부분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보통 목사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례비를 받는 목사들이 아니겠는가?
나는 목회자들이 세금을 낸다고 노동자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세금을 냄으로써 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나쁠 것 없다고 본다. 십일조나 헌금을 더 한다고 해서 그것을 삭감해 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라. 당신들이 늘 그렇게 주장하듯 '하나님의 것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혹시라도 일반인들이 당신들의 사례비에 깜짝 놀랄까봐 그러는 것은 아닌지, 공개하기에는 너무 액수가 커서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정신과 한참 멀어진 당신들의 모습이 드러날까봐 그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늘 날 목회자들에게 물질적인 가난을 요구하는 이들은 없으니까. 목회자들의 세금문제는 물질적인 부의 문제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어가보면 결국 영적인 빈곤에 대한 질타가 아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신약성서 마가복음 12장에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1:1-4)이 말씀을 나는 이렇게 고백하고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자랑할만한 만큼의 물질을 바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성된 마음으로 바치라는 말씀이다.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할 때 자주 등장하는 본문 중 하나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헌금을 바치되 과부처럼 전 재산을 다(?) 바치라는 이야기로 교묘하게 전했고, 듣는 이들은 그들대로 두 렙돈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 편한대로 받아들였다. 물론 맹신자들 중에는 전 재산을 다 바치고 패가망신한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엄밀하게 오늘날의 용어로 바꿔말하면 그리스도인의 경제정의에 관한 말씀이다.
'교회에 바쳐진 모든 예물들은 이렇게 과부의 두 렙돈과도 같은 것이다.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그 물질이 사용됨에 있어서 정의롭게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정의롭게 사용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원하시는 일에 사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것을, 과부의 생명과도 같은 두 렙돈을 갈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기자신의 비대한 몸을 유지하는데 그 귀한 예물들을 탕진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목사들은 억대 이상의 연봉을 받으면서 큰 교회(양적으로) 목사니 당연한 대접이라고 한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하고 능력이라 한다.
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예배당(건물)과 사례비와 교회행사를 위해서 과부의 두 렙돈이 사용되는 동안, 저 시골의 작은 교회 목사들이나 개척교회 목사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작은 사례비조차도 받지 못하고 사역하고 있으며 교인들 중에도 하루 세끼 건사하지 못해 범죄자가 되는 현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어 길거리를 떠돌아야 하는 이 시대의 가장들, 종일 폐휴지를 모아도 팔아도 만 원도 안되는 돈을 벌어 헌금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교인들의 헌금으로 먹고 사는 이들은 모두 검소하게 살 일이며, 사치하지 말아야 한다. 자발적인 가난, 청빈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경제정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