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개포동 주공아파트 모습.(자료사진)
선대식
오늘 친구모임에 다녀온 결혼 15년 차(40대 초반) K씨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아 기분이 좋았다.
사실 결혼할 때만 해도 K씨는 자신의 남편이 회사이름도 낯선 중소기업 직원이라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K씨가 강남 반포의 주공아파트에서부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상황은 역전되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전세에 살고 있는 것에 비해 K씨의 아파트는 10억원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오랜만에 본 친구들이 어디에 사냐고 물어볼 때마다 강남에 산다고 이야기하며 뿌듯한 마음이 든다. 강남 10억 아파트를 소유한 강남주민이라는 사실만으로 왠지 상류층이 된 기분이다. 내 인생은 이제 어느 정도 성공했다라는 자부심까지 들 때도 있다.
파트타임으로 일해 사교육비 마련... 그래도 "강남에선 못 나가"
그러나 친구들에게 부러움 대상인 K씨의 삶의 질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결정적인 이유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에게 지출되는 사교육비 때문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실제 수령하는 월급은 300만원 정도로, 그리 적지 않은 소득이지만 네 가족 생활비와 강남의 높은 사교육비를 감당하기에 이 돈은 모자랄 수밖에 없다.
결국 K씨는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요즘 파트 타임으로 마트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파트 타임으로 버는 돈은 월 100만원 정도.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도 두 자녀의 강남 사교육비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러다 보니 K씨는 자녀의 대학등록금이나 노후준비를 위한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집을 팔 수도 있지만 K씨는 결단코 강남에서 떠날 생각은 없다. K씨에게는 10억 아파트를 소유한 강남주민이라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은 강남에 살고 싶어 난리인데, 하물며 지금 살고 있는 강남을 떠나는 것은 어리석다'고 K씨는 생각한다. 또한 더 이상 강남 주민으로 살 수 없다면 그건 지금까지의 성공을 반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강남에서 계속 살 생각이다.
매일의 삶은 여느 사람 못지 않게 팍팍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10억 아파트를 소유한 강남주민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하며 K씨는 오늘도 마트로 출근한다.
돈 없이 집만 있는 노후?... 자녀들도 부담현재 K씨는 전혀 저축할 여력이 없다. 지금 40대 초반인 남편도 앞으로 길어야 50세까지만 직장 생활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저축해놓은 돈이 없기에 남편이 은퇴하여 소득이 끊기고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는 10년 후에는 결국 학자금 대출로 대학등록금을 충당해야 한다. 노후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K씨가 그래도 믿는 구석은 누가 뭐래도 10억 집이다.
그러나 집만으로 노후 준비를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다. 본격적인 노후가 시작되는 20년 후에 과연 집값이 어떻게 될 것이냐는 논란은 뒤로 하더라도, 노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서 살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얼마가 있느냐 이기 때문이다.
사실 노후에는 돈만 있으면 주택 문제는 지방이나 서울 근교의 싼 집을 선택하여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자산, 즉 돈이 없는 노후는 매우 불행하다.
더군다나 K씨 부부의 노후 의료비 지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자녀의 몫이다. 결국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취업하자마자 적자 생활을 시작했던 K씨의 자녀는 전혀 저축이 없는 부모의 의료비와 각종 노후 생활비를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물론 집값이 과거처럼 마구 올라서 20억, 30억이 되면 해결될 수도 있지만 그걸 기대하면서 인생을 건다는 매우 무모한 선택이다. 부동산 자산뿐만 아니라 금융 자산도 최대한 확보해서 노후와 자녀교육에 대비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