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현 광복회특별위원
박도
"잘 보셨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우리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그런 일에 앞장서야겠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민들이 의병이나 독립군의 활동에 대해 매우 무지합니다. 그래서 우선 의병 활동을 알리고자 올해 처음으로 <의병,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란 주제로 학술 토론회를 마련한 것입니다."
사실 나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서울에서 40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왕산로의 유래도 몰랐거니와 왕산 허위 선생이 내 고향 출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다가 중국 하얼빈에 가서야 알고서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광복회는 의(義)를 가장 우선하고, 다음 화(和)를 추구하며, 마지막으로 이(利)를 추구하여야지요. 그래 일각에서는 뒤늦었지만 '독립운동자 제자리 찾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못한다면 그럴 인재를 길러야지요. 그게 선열에 대한 후손의 책무라고, 선열 유족들은 깊이 명심해야겠습니다."- 조경환 의병장 생가와 산소에 얽힌 일화를 들려주세요. "생가는 광산 서방면 신안리인데, 지금은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으로 아파트촌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순국하신 뒤 일제가 시신을 훼손할까 첫 산소는 두엄자리에 평장으로 모셨답니다. 당시 일제는 효수(梟首)라 하여, 목을 잘라가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묘 때도 일제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멀리서 아버지 형제분들은 지게를 지고 절을 했고, 고모는 나물바구니를 끼고서 절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화순군 북면 선산에 모셨다가 해방 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모셨습니다."
- 후손으로서 희망사항은? "요즘 새로운 지번과 거리명을 부여하는 모양인데, 할아버지 생가마을 거리를 당신 호를 딴 '대천로(大川路)'로 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는 지자제에서도 별도 예산이 드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저희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의병이나 애국지사 생가마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어 시간 대담을 마치고 일어서자 조세현씨는 나에게 기왕에 여의도까지 왔으니, 광복회와 국가보훈처에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권하기에, 옆방의 광복회 남만우 사무총장과 위층의 보훈처 김영준 공훈심사과장, 정관회 사무관을 만났다. 나는 그 자리를 빌려 후손들의 사는 모습과 애로사항을 전하자, 광복회로서, 국가보훈처로서, 후손들을 다 아우르지 못하는 처지를 말씀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회원들의 권익과 보훈업무에 억울한 분이 없도록 더욱 심기일전하여 보살피겠다는 말씀을 듣고서 광복회관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