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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상상력 꽃은 가지에서만 피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나무 둥치에도 꽃이 피더군요. 저꽃은 아마도 햇빛이나 바람이 키운 것이 아니라 나무의 상상력이 피워올린 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 안준철
수업을 재미있게 해볼 요량으로 그날 배울 새로운 영어 단어를 칠판에 적어놓고 아이들과 스무고개 놀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이런 식이지요.
"선생님이 아주 좋아하는 말입니다."
"돈요."
"선생님 돈 좋아하는 건 맞는데, 아주는 아니야. 그리고 돈은 머니잖아."
"맞다. 그럼…."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매를 대지 않는 것도 이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이요."
"녀석아, 사랑은 러브잖아."
"아, 그렇지."
"선생님처럼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달나라를 정복하기 전에 시인들은 이것으로 달나라를 먼저 다녀왔지요."
"알았어요. 상상력이요. 맞죠?"
"그래. 1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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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에 핀 꽃 벽에도 꽃이 피었네요. 대단한 상상력이네요. ⓒ 안준철
아이는 수행평가에서 1점을 얻은 것이 무척 좋은 모양인지 금세 입이 귀에 걸립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눈의 초점이 모아지더니 이렇게 묻습니다.
"근데 선생님이 저희들에게 매를 대지 않는 것과 상상력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응. 그거?"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해주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다 싶어 전체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 말 안 들을 때 매를 대면 말을 잘 듣잖아요. 그러다가 또 말을 안 들으면 또 매를 대고. 그런 식으로 매가 만병통치약이 되면 선생님은 머리를 써야할 일이 별로 없게 되잖아요. 교사로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다고나 할까 기회가 없어진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상상력이 다 고갈될 테고요. 하지만 선생님은 매를 대지 않겠다고 여러분과 약속을 했으니까 매가 아닌 다른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요. 고민을 많이 하다보면 선생님의 상상력도 그만큼 풍부해질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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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에서 핀 꽃 진달래꽃이 땅에 떨어져 다시 환생했네요. 상상력이 풍부한 화가의 그림 같네요. ⓒ 안준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한참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잡담소리가 들렸습니다. 고백하자면, 제 수업시간은 좀 시끌벅적한 편입니다. 하지만 수업시간의 절반 이상이 수행평가와 관련된 재미있는 퀴즈놀이거나, 모둠끼리 상의하여 주어진 문제를 푸는 그런 방식이어서 조금 떠들어도 수업 진행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어기초가 부족한 전문계 학생들에게 영어를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한, 제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비방인 셈이지요. 물론 이런 수업방식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수년 동안의 고민과 상상력의 산물이랄까요.
제가 학생들에게 정숙을 요구하는 시간은 딱 15분입니다. 아이들도 저와 약속한 그 시간만큼은 정신을 집중하고 수업에 임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물론 학교에는 이런 최소한의 규칙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말입니다.
저는 잡담의 주인공들을 교실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두 아이가 엉거주춤 일어나 나오려고 하자 다시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업을 계속하다가 문득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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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레지 산에 가서 얼레지처럼 빼어나게 예쁜 꽃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지요. 저렇게 예쁜 꽃이 어디에서 왔을까? 왜 피었을까? 이런 생각을 끝도 없이 하다가는 문득, "아, 나더러 이런 상상력에 빠져보라고 피어 있는 것이구나!"하고 웃고 말지요. ⓒ 안준철
"방금 전에 선생님이 한 행동도 일종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그걸 생각해내는데 한 사오년 걸렸을까요?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에게는 인격이라는 것이 있어요. 혼날 줄 알았다가 그냥 자리에 앉게 되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지요. 봐요. 지금 두 친구 열심히 공부하잖아요.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게요."
저는 두 아이를 쉽게 용납했지만 두 아이도 저에게 꼼짝없이 당한 꼴이 되고 말았지요. 문제는 두 아이가 그런 일이 있은 뒤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아 잡담을 하다가 걸려 또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인데,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아이는 또 일어나자마자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까요.
두 번씩이나 용서를 받았으니 세 번을 연거푸 떠들기는 좀 뭐할 테고, 그러다보면 수업도 다 끝이 날 텐데, 정작 제 걱정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용서를 해주었는데도 떠들면 사람도 아니라고 말한 바로 그 때문이었지요.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제 할 탓이지만 그래도 어딘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전매특허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렇게 말을 해주었지요.
"너희들 그래도 떠들면 정말 사람도 아니다, 천사지."
그런 말을 듣는 그 순간, 두 아이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 것인지 상상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지요. 두 아이의 눈빛을 직접 목격했으니까요. 제가 농담 삼아 발음한 ‘천사’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바로 그런 눈빛이었지요. 수업시간에 막무가내로 떠들기만 하는 한심한 녀석들이 말이지요.
교육은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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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마리 아주 흔한 꽃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꽃이지요. 학교에도 그런 아이들이 참 많지요. 상상력이 고갈된 교사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숨은 보석과도 같은 아이들 말입니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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