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팔찌 채우면 성범죄 사라질까

[기고]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등록 2008.05.07 17:34수정 2008.05.07 17:34
0
원고료로 응원
국가에게는 형벌권이 있고, 그것은 국민들의 합의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면 대체로 국민의 안전, 질서유지, 정의실현 등을 위해 국가가 형벌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끔찍한 어린이 성폭력·납치·살해 사건이 연달아 발생한 요즈음, 정부에서 정신없이 내놓는 각종 대책을 보면서 국가의 형벌권이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부는 사회가 함께 보호해야 할 대상인 어린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범죄자에게는 기존보다 형량을 더 높이고(경우에 따라 사형도 불사하며), 재범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자발찌, DNA정보 축적 등 감시를 철저히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한단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성인에 대한 분노는 너나 할 것 없이 높고, 그런 사람은 철저하게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에도 별 이견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은 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안양 초등생 납치 살해 사건 피의자 정아무개씨.
안양 초등생 납치 살해 사건 피의자 정아무개씨.최병렬


엄격한 처벌로 범죄를 없앨 수 있나?

우선 나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형량이 너무 낮아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런 무서운 범죄가 일어났는가? 더 엄격한 처벌을 가하면 이런 범죄는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인가?


형량별 범죄발생율과 같은 자료를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가타부타 답변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부가 대책을 발표하는 어떤 자료를 뒤져봐도 형량을 높이면 범죄율이 줄어들 것이라는 가설을 지지하는 근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건 마치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더 올곧은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유사하다.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자녀를 '더욱' 엄히 다스리면 교정될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과 유사하다.


엄벌주의가 의도하는 효과는 벌이 무서워 감히 죄지을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형량이 5년일 때는 무섭지 않았는데 7년이 되니 무서워져 범죄계획을 포기할까? 나의 유전자 정보를 국가가 가지고 있으니 쉽게 발각될 것이 두려워서 재범 계획을 포기할까?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해도 예방 효과가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하겠다.

"근거없는 대책에 기대 근거 없는 안도감을 얻고자 하는가?"

이건 극단적으로는 죽고 사는 심각한 사안이다. 나의 어린 자녀나 이웃집 어린이가 범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런 범죄가 피해자 본인이나 주변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크다. 이렇게 심각한 사안일수록 '철저한', 다시 말해서 정말 효과를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가해자 교정교육 없이 재범 방지할 수 없다

범죄자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욱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범죄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도 나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를 위한 정부의 예산은 얼마나 책정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연구는 장기적인 대책이라고 하자. 당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연구를 통해 더욱 심도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성폭력이 발생하는 우리사회의 문화와 구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여성운동단체들이 많고, 가해자 교육 운동을 활발히 펼치는 시민단체들도 있다. 이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목소리에는 왜 귀를 기울이지 않는가? 이들의 전문성을 의심해서인가?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의심해서인가?

법이 있으되 어린이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는 성인중심적 편견 때문에 정말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 피해자가 경찰조사, 검찰조사의 힘든 과정을 다 겪고도 그 법으로 보호받는 것에 결국 실패한다.

판단력이 미숙하고 사회적 자원에 대한 접근권이 없어 법적 구제를 받기 어려웠던 어린이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피해를 법적으로 해결하려 하면 '공소시효' 제도에 발목이 묶여 어떻게도 해보지 못하는 일이 현장에서는 오늘도 발생하고 있는데, 이런 오래된 문제제기는 애써 외면하면서 대뜸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도한 대책인가?

체계적인 가해자 교정교육 없이는 재범을 방지할 수 없다고 지겨울 만큼 강조했지만 아직도 교정교육이 제대로 실시되고 있는 교도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강간 통념과 여성 비하의식 등 잘못된 가부장적 성통념을 수정한 후 이를 반복해서 학습 훈련시키는 것이 약물치료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여성신문> 4월 4일자)는 보도내용은 사실 오랫동안 수없이 알리고 주장해왔던 내용이 아닌가.

얼마 전 일산에서 여자 어린이를 엘리베이터에서 폭행하고 끌어내려했던 가해자는 이미 유사한 범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한 전과자였다. 10년형이 재범 방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0년이 너무 짧았던 것일까?

그는 CCTV가 작동하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CCTV로는 부족한가? 전자발찌를 부착하고 있었다면 감히 범행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CCTV에, 전자발찌에, 유전자 정보 집적에…. 또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시장치가 구현되는 사회를 그려보자.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안전한 사회인가? 그런 사회라면 내 자식의 안전만큼은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CCTV를 교란시키고, 전자발찌를 해체하며, 유전자 정보를 해킹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내가 믿고 의지했던 감시장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때 가서 더욱 강력한 대책을 강구해내면 되나?

 31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주엽2파출소에서 일산경찰서 박종식 형사과장이 어린이 폭력(납치미수)사건애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31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주엽2파출소에서 일산경찰서 박종식 형사과장이 어린이 폭력(납치미수)사건애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권우성


근거없는 엄벌주의에 기대지 말라

처벌은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고, 범죄 피해자의 치유에도 도움이 되며,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처벌이 이런 효과를 가지려면 처벌의 내용과 수위에 대하여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처벌의 목표는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어서 복수하거나,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어 옴짝달싹 못하게 함으로써 약간의 안전이라도 부수효과로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폭넓게 본다면 법과 제도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는 우리가 안전하고 정의로우며 합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삶에 기여하지 않는 법과 제도는 불필요하다.

근거없는 엄벌주의에 기대 우리 삶의 지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꼼꼼히 되짚어보고, 행여 정부가 손쉬운 임시방편책으로 국민의 불안과 분노를 잠재우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해보아야 한다.

그 사회에 범죄와 폭력이 난무한다면 그 책임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것이다. 우리 사회에 왜 성폭력, 납치, 살인과 같은 폭력행위가 발생하는지, 왜 우리의 공동체가 이렇게 병이 들었는지, 가해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인지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자.

아무런 대책없이 각종 위험과 폭력에 무작정 노출된 어린이는 없는지, 우리사회의 차세대 주자인 어린이들이 오늘 도대체 무얼 보고 배웠는지, 내 아이 말고 옆집 아이도 건강하고 행복한지, 그래서 내 아이와 함께 행복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자.

내 아이를 때린 아이는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그 행위에 대해서 합당한 대처가 있었는지, 혹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는 않았는지 성찰해보자. 아이에게 사랑과 기쁨이 아니라 폭력과 경쟁, 미움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해보자. 행여 사회적 약자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자.

정말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도 정말 안전한 사회에서 마음 놓고 살고 싶다. 낮이든 밤이든, 사람이 북적이는 도심이든 한적한 외딴 곳이든, 나의 계획에 필요하다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나의 지당한 권리가 보장받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벌주의 정신으로는 이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모든 사람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 여성이여서, 장애인이여서, 어린이여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너도 사회의 일원이니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해주는 사회이어야 할 것 같다.

부조리와 부정의가 만연하여 사람들의 불만과 불신이 높은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고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사회,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자아존중감을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회, 이런 사회라면 나는 정말 안심하고 살겠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AD

AD

AD

인기기사

  1. 1 땅 파보니 20여년 전 묻은 돼지들이... 주민들 경악 땅 파보니 20여년 전 묻은 돼지들이... 주민들 경악
  2. 2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3. 3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4. 4 '기밀수사'에 썼다더니... 한심한 검찰 '기밀수사'에 썼다더니... 한심한 검찰
  5. 5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