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넘은 노인이 일과표에 따라 살아야 했던 이유

[서평] 혼자 남겨진 아버지의 홀로서기 <아버지의 부엌>

등록 2008.05.14 10:17수정 2008.05.14 12:00
0
원고료로 응원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누구나 고아가 되는 것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제 철도 좀 들고 돈도 좀 벌게 되어 부모님까지 챙길 수 있게 되었는데, 부모님 살아오신 삶도 얼마쯤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젠 부모님 세상 떠나실까 노심초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늘어만 가는 부모님 주름살이 안타깝고, 약해져만 가는 부모님 관절이 슬픈 것이다. 하지만, 고령화로 치닫고 있는 요즘 고아가 되는 것 못지않게 자식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또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1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는 그때 할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언제나 차려져 내오는 밥을 드셨고, 그대로 상을 물리셨다. 그러고는 할머니가 잘 다려놓은 한복을 챙겨 입으시고 노인정으로 산책을 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그 후 15년 동안 작은아버지 집에 잠깐 계시다가 딸네(고모) 집으로 옮겨가셨다. 며느리가 챙겨주는 밥보다는 딸이 챙겨주는 밥이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고, 그 때는 고모네 아이들이 어렸을 때라 그 아이들도 봐주면서 그렇게 지내셨다.

하지만, 그 긴 세월은 할머니도 고모도 많이 지치게 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잔소리가 늘어가는 것인지 할머니는 그 잔소리로 이미 대학생 부모가 된 고모를 힘들게 했다.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는 코스프레하는 딸을 이해하는 고모와는 이미 살아온 세월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오래 사셨다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

만일 할아버지가 오래 사셨다면…


a  아버지의 부엌

아버지의 부엌 ⓒ 지향


이 책, <아버지의 부엌>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느 날 갑자기 80이 넘으신 아버지가 혼자 남겨진 것이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자 평생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던 아버지가 세상에 남겨진 것이다.

오십이나 육십을 넘긴 딸들 역시 이미 손자까지 보았고, 아버지가 은근히 모셔주기를 바라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그 나름대로 사는 게 힘들어 아버지 모시기가 어렵다. 결국 이 80이 넘으신 아버지는 혼자 사시겠다고 선언하고, 자식들 역시 그게 당장은 가장 나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혼자 사시겠다고 했지만,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던 아버지였던지라, 이미 50이 넘은 이 책의 작가는 그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게 된다. 아주 혹독하게 일과표를 짜 주면서 혼자서라도 건강하게 활기차게 살 수 있도록 지독하리만치 가르친다.

아침엔 6시에 일어나 씻고, 밥을 하고 반찬은 몇 가지를 만들며, 점심은 간단하게 우동으로 먹고, 산책은 어떻게 하며, 저녁은 몇 시에 먹고 문단속은 어떻게 하며 등 말이다.  물론 그 속엔 혼자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 녹아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작가는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편지 쓰기와 일기 쓰기를 제안한다. 이 책은 그렇게 쓴 아버지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이 책은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았고,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짠하고 안타깝고 또는 감동적이었을지 눈에 선하다.

기력있는 젊은이도 만만치 않거늘...

사실 나이가 80이 되지 않아도, 젊은 사람들 역시 혼자 산다는 것은 참 외롭고 힘들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설거지통엔 씻지 않은 그릇들이 넘쳐나고, 어느 날은 결국 씻어놓은 젓가락이 없어 나무젓가락을 찾아 서랍들을 뒤지기도 한다.

술이라도 마신 날은, 외로움에 떨다 휴대폰 목록을 뒤적이기도 하고, 불꺼진 빈 집을 들어가며 그 싸늘함에 몸을 떨기도 하는 것이다. 기력이 있는 젊은이들도 혼자 산다는 게 이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하물며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는 오죽할까.

그래도 이 할아버지는 자식과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아침 6시에 일어나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든다. 어느날은, 반찬 만들기 귀찮다고 투정을 부리시기도 하고, 밥하기 귀찮다고 사먹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는 열심히 사신다. 그 모습이 참 짠할 정도로 말이다.

아직은 부모님 건강하시고, 걱정은 없지만, 나도 20년 안엔 고아가 될 텐데, 고아가 되기 전 이런 상황이 내게도 펼쳐진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젠 슬슬 아빠에게도 쌀 씻는 법이라든지, 국 끓이는 법, 나물이라도 하나 무치는 법, 아니 세탁기 작동법이라도 가르쳐드리라고 엄마에게 말씀드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엄마가 하루라도 더 오래 사시길 바라야 하는 걸까.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가까운 미래다.

아버지의 부엌 - 노년의 아버지 홀로서기 투쟁기

사하시 게이죠 지음, 엄은옥 옮김,
지향, 2007


#책 #아버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AD

AD

AD

인기기사

  1. 1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2. 2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3. 3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집안일 시킨다고 나만 학교 안 보냈어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4. 4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5. 5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겁나면 "까짓것" 외치라는  80대 외할머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