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궂은 청상과부와 며느리

[구순 노모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①] 시어머니 죽이기?

등록 2008.05.30 14:49수정 2008.05.3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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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 나는 어김없이 엄니께 전화를 겁니다.


"막내야! 다른 집에는 모내기를 한다고 야단인데, 너거는 우짤라꼬 그냥 있노?"
"엄니, 신경 쓰지 마이소. 다 알아서 합니더!"
"살아 있는데, 우찌 신경이 안 쓰이노…. 그래, 너거 알아서 해라!"

엄니는 올해 꼭 아흔이십니다. '기미년 만세'가 한창이던 날, 할아버지 진갑년에 났다고 이름도 '진갑'입니다. 열여섯에 바로 이웃동네로 시집 와서 이제 일흔네해가 되었습니다. 엄니는 구순이신데도 여전히 농사 걱정을 붙잡고 계십니다.

"며느리가 사 온 명태로 국을 끓여서 잘 먹었다."

그제(5월 27일)는 퇴근길에 아내와 엄니께 들렀습니다. 그동안 시험에 시달리면서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몰랐는데, 벌써 산야는 푸르게 옷을 갈아입었고, 초여름의 풋풋함이 바람이 되어 차창으로 전해집니다.

나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아내의 손을 꼬옥 잡는데, 아내의 눈가에 물기가 어립니다. 2년 동안, 이 못난 남편을 위해 매일 따뜻한 두 개의 도시락을 준비한 아내가 너무 고맙습니다.


1시간여를 달려, 고향마을 읍내에서 우리 부부는 엄니께서 드실 밑반찬 몇 종류를 샀습니다.

"야들아, 너거가 왔나?"


엄니는 마음이 없는 이 막내아들의 볼을 쓰다듬는데, 나는 울컥해서 한숨을 토해냅니다.

"잘 될 끼다. 아무 걱정 말거래이!"

아내는 열심히 냉장고를 치웁니다. 형제가 많아서인지 냉장고에는 엄니가 채 드시지 못한 반찬이 꽤 많은가 봅니다. 아내의 분류작업이 끝나고 나는 오래된 반찬류를 거름간에다 버립니다.

"어머님, 아끼지 마시고 드세요. 그래야 저희가 맛난 음식을 자주 사올 것 아닙니까?"
"오냐! 너거가 내한테 맛있는 음식 마이 멕여서 빨리 죽어라꼬 그라제?"

우리 부부가 놀라서 쳐다 보는데, 엄니께서는 혼자 소리내어 웃습니다.

"옛날에 우떤 마을에 외동아들을 키우며 사는 심술궂은 청상과부, 여펜네가 살았더란다. 아들이 장성해서 장개를 보냈는데, 며느리하고 아들이 너무 사이가 좋은 기라! 내가 저년을 우째 골탕을 멕일꼬, 맨날 그 생각만 했능기라. 그래서 살림 잘 몬한다꼬 머리끄댕이를 쥐어뜯고, 일 몬한다꼬 이웃이 떠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괌(고함)을 지렀능기라. 또 며느리 험구는 울매나 하는지, 동네 사람들도 귀를 막을 정도였더란다.

며느리가 새북(새벽)에 물을 이다가 물독을 깨었다꼬, 친정으로 쫓아 보내어서는 결국 장독값도 사돈집에서 받아내고, 꾸정물에 밥떠꺼리(밥풀)이 묻어 나갔다꼬 억지로 며느리 입에다 쑤셔넣는, 참말로 악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시어마씨였제. 그래도 서방이라꼬 밤에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신랑이라는 사람은 제 어미 눈치만 살피는지 '참아라' 소리만 하니, 며느리는 가슴이 저미도록 서럽고 울매나 외로웠겠노?

어머니는 '휴' 한숨을 깊게 내쉽니다.

그래서 삼 년이 지난 우떤 날, 겨우 말미를 받아 친정집에 다니러 간다면서 이웃 동네 단골네(무당집)를 찾아갔더란다.

새댁을 본 무당을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박수를 치더니만 그동안 며느리가 겪었던 심정을 길고 긴 사설을 풀어 놓더란다. 새댁은 숨이 막혀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제.

"단골네, 내가 우째야 되겠노? 죽을라꼬 밤에 저수지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죽지도 몬하고 그냥 돌아오고……." (예전에는 단골네(무당)나 고지기(동네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어린아이까지도 '하게'체를 썼다고 합니다.)

"언자 걱정 마소! 그냥 시어마씨를 쥐도 새도 모르게 쥑이는 방법을 갈쳐 줄낀 게네 잘 따라만 하소!"

집으로 온 며느리를 그날 이 후, 지극정성으로 시어마씨를 모셨제.

"단골네의 처방이 무엇인지 너거는 짐작이 가나?"

엄니는 이제 빙그시 웃습니다.

"그래, 바로 시어마씨를 살을 찌워서 빙(병)이 들게 해서 죽이는 처방인기라."

우쨌든 며느리는 시어마씨가 눈치를 챌까봐 지극정성을 받치는디끼(듯이) 숭내(흉내)를 내면서 맛난 음석(음식)을 만들어서 조석으로 봉양을 했다 아이가?

시어마씨는 처음에는 '이 년이 무슨 요사를 부리나' 싶어서 잔뜩 경계를 했는데,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는데도 며느리는 똑같은 기라. 시어마씨의 혈색이 좋아지고, 이웃집에 마실을 가서도 칭찬을 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제.

시어머니가 변하니 며느리도 변할 수밖에 없었제. 며느리는 점점 칭찬을 하는 시어마씨가 좋아지게 되고, 기름진 음식대신에 진짜 맛난 음식을 해 드렸제. 또한 조석으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조곤조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란다. 그래, 며느리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고, 늙어서 병이 든 시어마씨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서 나랏님이 내리는 효부상을 받았단다.

저녁식사로, 읍내에 시킨 냉면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손으로 만든 면이라카더마는 참 맛나다. 마이 묵어라!"

엄니는 면을 덜어내어 며느리의 그릇에 옮겨 놓습니다. 그러다가 당신 그릇에 든 계란을 슬쩍 집어서 내 입에 넣어줍니다.

"저는 됐습니다. 어머님, 많이 드세요."

손사래를 치는 아내의 등을 엄니는 가볍게 토닥입니다. 5월의 싱그러운 봄내음이 세 식구의 가슴을 훑고 지나갑니다.
#고부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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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있는 소시민의 세상사는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가입을 원합니다. 또 가족간의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글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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