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잃은 애미는 통곡한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72] 천륜을 갈라놓은 국력

등록 2008.07.12 19:49수정 2008.07.1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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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각.  조선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청나라에서 마중 나오던 혼하 강변에 있다.
심수각. 조선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청나라에서 마중 나오던 혼하 강변에 있다.이정근

원손 일행이 심양에 도착했다. 천 칠백여리 머나먼 길이다. 다섯 살 어린애에게는 혹독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엄마에 대한 그리움 하나로 참고 견디며 심양에 도착했다. 원손과 인평대군이 혼하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청나라는 용골대를 내보내어 영접하게 했다. 장수 5명과 함께 혼하 강변에 도착한 용골대가 원손을 호종하고 온 빈객 오준을 다그쳤다.

“원손이 출발한 지 이미 여러 달이나 되었다. 무슨 연유로 중도에서 지체하였는가?”
“원손이 나이가 어리고 병이 많아 쉽게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변명은 듣기 싫다. 빈객은 중한 처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눈알을 부라리던 용골대가 말에서 내려 가마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아이로 바꾸어 보냈는지 내가 살펴보겠다.”

대동한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가마의 장막을 걷어 올리라 명했다. 원손이 한성을 출발하기 전, 조정에서는 다른 아이를 대신하여 보내자는 중론이 있었고 이 논의가 첩자를 통하여 심양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중관이 가리개를 걷어 올렸다. 무심코 가마에 앉아 있던 석철이 소스라치게 놀랬다.

먼 길 왔지만 엄마를 만날 수 없는 아들

“어마마마를 보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다. 빨리 어마마마 있는 곳에 가게 해다오.”


약간 겁먹은 목소리였지만 당당했다.

“행동거지가 원손이 맞는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용골대가 가마 속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구렛나루가 시커먼 용골대의 험상궂은 얼굴과 마주친 석철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엄마한테 빨리 보내달란 말이다.”

아무리 법도가 지엄한 왕실의 원손이지만 애는 애였다. 사가의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당황한 용골대가 가리개를 급히 내리며 가마에서 한 발 물러섰다.

“원손을 모시고 동관에 들라.”

원손 일행은 세자관에 들르지 못하고 동관으로 직행했다. 동관에 도착한 석철이 엄마를 찾았다. 강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원손이 울음보를 터트렸다.

“심양에 가면 어마마마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해놓고서 왜 엄마가 없는 거냐?”

석철이 목 놓아 울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내관들의 가슴이 미어졌다. 며칠 후, 원손과 인평대군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입궐했다. 원손 일행만 단독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매월 거행되는 조참의례에 다른 제왕들과 함께 부른 것이다. 황궁에는 별도의 부름을 받은 봉림대군이 먼저 와 있었다.

숭정전.  황제의 자리. 숭정전은 심양고궁에 있다
숭정전. 황제의 자리. 숭정전은 심양고궁에 있다이정근

옥이 깔린 숭정전 3단 대석 위에 제좌(帝座)가 있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용 2마리가 나무로 조각되어 걸려 있다. 발톱을 곧추세운 모습이 청나라의 공격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단상 안쪽 황제의 자리에 홍타이지가 앉아 있고 청나라 조정 대소신료들이 두 줄로 도열해 있었다. 계단 아래 돌바닥에 무릎을 꿇은 원손이 4배를 올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봉림대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온 몸에 흐르는 피가 머리끝으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돼지 같은 오랑캐 수장에게 절을 올려야 하는가?”

부복하고 있는 어린 조카를 바라보는 봉림대군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서 붙잡혀와 형이 황제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도 마음이 아팠고 자신이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보다도 가슴이 아렸다.

“나라가 약해서이다. 우리의 힘이 강하다면 나이 어린 조카가 이러한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나와 형님이 여기에 붙잡혀와 있는 것도 우리 조선의 힘이 약해서다. 나라를 보존하려면 힘을 길러야 하고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싸워 이겨야 한다. 전쟁을 방지하는 것도 힘이고 싸워 이기는 것도 힘이다. 국채의 근간은 힘이다.”

힘이 받쳐주지 못한 계획은 공허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왕의 전쟁 방지책에는 아쉬움이 컸다. 훗날 효종으로 등극한 봉림대군은 이때의 결기를 바탕으로 북벌계획을 수립했으나 힘이 없는 계획은 공허했다. 부복한 원손 사이에 범문정을 두고 황제가 물었다.

“원손은 몇 살이냐?”
“다섯 살이옵니다.”
“그놈 똘똘하게 생겼구나.”

석철을 바라보던 황제가 인평대군을 불렀다. 인평대군이 사배를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나이가 얼마인가?”
“올해 열아홉입니다.”
“자녀가 있는가?”
“없습니다.”

인평을 단하로 내려 보낸 황제가 봉림대군을 불렀다. 봉림 역시 4배를 올리고 부복했다.

“자녀가 몇인가?”
“병자년 전에 낳은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으로 온 후 역병으로 죽었습니다.”
“안됐군...”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차를 내놓았다. 이것으로 황제 알현이 끝났다. 황제 배알을 마친 원손에게 범문정이 지시했다.

“이제 원손은 세자관으로 돌아가도 좋다.”

모자 상봉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황궁을 빠져나온 원손 일행은 세자관으로 향했다. 가벼운 발걸음이다. 원손이 황궁을 출발했다는 전갈을 받은 강빈은 대문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오가는 청나라 사람들뿐, 원손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컸을까?”

강화도에서 10개월 핏덩이를 내관에게 넘겨주고 4년. 모정마저 끊어놓은 한 많은 세월이었다. 생사마저 몰랐던 석철이 살아 있었다는 데 감사했고 만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강보에 쌓여 생글생글 웃던 그 모습. 뇌리에 살아 있지만 얼굴의 윤곽마저 가물가물했다.

“머나먼 길 오느라고 병이라도 들지 않았을까?”

자신도 한성을 떠나 이곳 심양까지 와봤지만 적잖은 거리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노숙이 다반사였다. 하늘을 이불삼아 벌판에 누었을 때 칼바람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자신은 세자 저하라는 버팀목이라도 있었는데 혼자 오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조국을 잃은 애미는 너를 가슴에 안고 통곡한다

이때였다. 멀리서 오는 일단의 행렬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이슬 맺힌 망막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분명 낯익은 모습이었다. 조선식 가마였다. 원손의 행차라 확신한 강빈은 그대로 뛰었다. 궁실 여인은 물론 사대부들도 뛰지 않는 것이 양반의 법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빈에게 체신은 거추장스러웠고 피 끓는 모정이 앞서갔다.

“석철아!”

가마를 붙잡은 강빈이 목 놓아 흐느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빈객과 내관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마에서 내린 원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이 여인이 엄마라는 사실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석철아! 엄마다. 엄마.”

석철을 가슴에 안은 강빈은 오열했다. 이 순간 강빈은 지체 높은 세자빈이 아니라 잃어버린 새끼를 다시 찾은 어미였고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아들을 만난 애미였다.

강빈의 품속에 머리를 묻은 석철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난생 처음 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자신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석철은 그 눈물 속에서 끈끈한 체온이 전해 오는 것을 느꼈다.

석철을 품에 안은 강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땅이 꺼진다 해도 무섭지 않았다. 땅이 꺼져 땅속에 묻힌다 해도 아들 석철이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 아들 석철이와 함께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바람이 분다. 남동녘 고국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이다. 나뭇잎이 흔들린다. 나뭇잎 춤사위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가늘게 시작한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졌다. 석철을 껴안은 강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굵어진 빗방울이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빗물이 되어 석철의 머리 위에 흘러내렸다.
#심양 #황궁 #원손 #강빈 #봉림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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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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