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죽 한 그릇'으로 살다간 사람

유고집 <고향길> 통해 본 인간 윤중호 형

등록 2008.09.29 11:37수정 2008.09.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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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윤중호 시인
고 윤중호 시인윤중호를 사랑하는 사람들

얼마 전 대전시민아카데미의 신명식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중호형 얘기 좀 해줘요."
"뭔 얘기를?"
"중호 형 시에 대해 문학 강연 좀…."

4년 전 세상을 떠난 윤중호 형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거였다. 신명식씨는 치과의사다.  대전 공단 주변에 치과를 차려놓고 살림형편이 어려운 사람들과 외국인 노동자 등을 무료로 치료를 해주고 있다. 그를 생각하면 늘 빚진 마음이 앞선다.

"문학 강연요? 아이구 못혀유. 중호형 시에 대해 잘 몰라유."
"그럼 문학 강연이 아니더라두 그냥 가까이 지냈던 후배 입장에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아 못튜, 저 보담 형을 훨씬 더 잘 아는 선배덜이 수두룩 헌디. 촌놈이 주제넘게 강연은 무슨…."
"강연이 아니더라두, 그냥 술자리에서 얘기하는 거처럼 자연스럽게 하믄 돼요."

거듭 부탁을 하기에, 자꾸만 꽁무니 빼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아 건성으로 그러마 약속을 해놓고 중호형 살아 생전 가깝게 지냈던 선배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그냥 혀, 니가 못할 거 없잖어, 후배 입장에서 그냥 얘기 하면 될 거 아녀."
"그러긴 한디, 그래두…."


 고 윤중호 시인의 유고집-고향 길(문학과 지성사)
고 윤중호 시인의 유고집-고향 길(문학과 지성사)송성영
말 주변머리도 없는 촌놈이 공연히 형을 욕보이게 하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형의 유고집 <고향 길>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뭘 얘기해야 할 것인지, 형과 나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나갔다.

형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은 그동안 내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을까?' '어떤 애정을 품고 살아왔을까?'이기도 했다.


형과 인연을 맺어 오면서 사실 나는 형의 시 세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형과 여려차례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지만 함께 찍은 사진은 결혼식 때 단체로 찍은 단 한 장이 전부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여름날, 다쓰러져 가는 사랑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잘 익은 죽순 술이나 석류 술 단지를 비워 노래를 담아놓거나 했고 겨울에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군불을 지펴가며 형이 "그렇지 잉" 그러면 "그류"라는 식으로 세상사는 얘기를 나눴지만 시가 어떠니 문장이 어떠니 문학에 관한 얘기를 나눈 기억이 도통 없었다.

이른 아침이면 뒷산에 올라 멀리 계룡산을 바라보며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거나 했지만 호흡이 어쩌니 기운이 어쩌니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시골 생활사를 기록한 ,<오마이뉴스> 연재 글을 묶어 책을 낼 때 형이 서문을 써 주고 교정까지 봐 주었는데 그때 그런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내 글을 두고 어떤 선배가 문학적이지 않다고 하자 형이 이랬던 것이다.

"글이라는 게 빤드르르하니 잘 쓰는 거보담,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가가 중요한 거지."

형과 그렇게 만났다. 글보다는 진실성으로 만났다.

그동안 형의 유고집 <고향 길>(문학과 지성사)조차 최근에 들어서야 깊은 관심을 갖고 접했다. 시집을 받은 지 3년이 되었음에도 그동안 꼼꼼하게 읽지 않았던 것은 형은 형이고 시는 시일뿐이라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형의 흔적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향 길>을 접하면 소름이 돋는다는 주변 사람들이 말이 실감이 갔다. 형의 시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혹은 본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형의 말년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율을 느끼게 했던 것은 이미 형 자신이 떠날 곳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잠깐만요, 마지막 저
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
무덤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
이. 제. 됐. 습. 니. 다.

- <고향 길> 미완유고시 '가을'

언젠가 어떤 모임 뒤끝에 자정 넘은 술자리에서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엄니 한티 가야것다."
"비가 너무 오는 디유."
"그래두 가야겠어."

형은 오래 전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서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엄니의 품속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산딸기가 무리져 익어가는 곳을 알고 있다.
찔레 새순을 먹던 산길과
삘기가 지천에 깔린 들길과
장마 진 뒤에, 아침햇살처럼, 은피라미떼가 거슬러 오르던 물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넘실넘실 춤추는 꽃상여 타고 가시던
길, 뒷구리 가는 길, 할아버지 무덤가로 가는 길
한철이 아저씨가 먼저 돌아간 부인을 지게에 싣고,
타박타박 아무도 모르게 밤길을 되짚어 걸어간 길
웃말 지나 왜골 통정골 지나 당재 너머
순한 바람 되어 헉헉대며 오르는 길, 그 길을 따라
송송송송 하얀 들꽃 무리 한 움큼씩 자라는 길, 그 길 따라
수줍은 담배 꽃 발갛게 달아오르는 길
우리 모두 돌아갈 길
그 길이 아득하다.

- <고향 길1>

형의 고향 길은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길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고향 길>은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길'에 관한 절절한 이야기'이며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인 것이다. 형에게 있어서 그 길은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었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은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아무것도 이룬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 '영목에서' 중에서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은 또한 우리들의 고향사람들이 살고 돌아간 길이다. 그렇게 유고집 <고향 길>에는 엄니가 있고 할머니가 있다. 고향사람들이 있다. 가난하고 슬픈 이웃들, 이름없는 풀뿌리 민중들이 있다. 형의 '민중'은 윤재철 시인 말대로 '정치적이고 목적론적인 민중'이 아니다.

또한 형이 가고 싶은 <고향 길>은 마음자리이기도 했다. 형은 세상을 뜰 무렵 예전과는 달리 말수가 줄었었다. 말없이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 조성일 형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나를 보고 있지…."

그런 것 같다. 형의 <고향 길>은 과거이면서도 늘 그 자리에 있는 본래의 마음자리가 아닌가 싶다.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맑고 순수한 세계. 그 안에는 삼삼한 고향이 있고 형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불쌍한 중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불쌍한 중생'은 가난하고 슬픈 고향 사람들이면서 또한 형 자신이기도 했다. 진즉에 불쌍한 중생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실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형이 잘 쓰는 말 중에 건방떨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잘난 척, 아는 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즉에 불쌍한 중생임을 알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병들고 죽는 불쌍한 중생임을 깨닫는 순간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 스스로 잘난 인간들은 잘난 것에 가려 그걸 알지 못한다. 잘난 욕망에 가려 자신의 마음자리를 볼 수 없다. 제 잘났다고 내세우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소통이 안 된다.

오래 전 형과 내가 서산 터미널 한 구석에서 곤계란에 잔술을 파는 할머니의 좌판 앞을 지나치지 못해 4박 5일을 보낸 적이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수없이 떠나 보내고 잔술 파는 할머니 좌판에서 시작해 오늘은 누구를 불러내고 내일은 또 누구를 만나 그렇게 4박 5일을 보낸 적이 있다.

한 많은 펑퍼짐한 식당 아줌마나 잔술 파는 할머니는 고향집 엄니나 다름없다. 좌판 옆에서 잔술을 기울이는 막일꾼 아저씨들 또한 유고집 <고향 길>에 등장하는 고향 사람들이나 다름없다. 친구이고 아저씨이고 형님이다. 그렇게 가난하고 슬픈 고향 사람들을 만나면 아픈 만큼 술맛이 난다. 잘난 척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 통한다.

곳곳이 형의 술자리였지만. 형의 술자리는 그저 취해 비틀거리는 한탄의 자리가 아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나는 자리다. 사람들의 막힌 속을 해장국처럼 기분 좋게 풀어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형은 끼지 않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친구보다는 친구 아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늦은 밤 불청객처럼 아무개네 집을 불쑥 쳐 들어가도 문전박대할 안주인들이 없었다. 우리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고 늘 아내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밉지 않았다. 아내의 속 풀어 주는 형이 고마웠다.

"저 인간 고집불통에 승질머리가 지랄같구 생활전선에 큰 보탬이 안 돼두 거시기한 구석은 있잖유? 어떡허것슈? 제수씨가 그냥 다독거리며 데리고 살아야지."

아내의 손을 들어주되 장단이 있었다. 형의 '아내 달래기' 방식은 내 책의 발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도 내가 서방의 선배 쪼가리라구, 부인이 한바탕 피 터지게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나는 영감처럼 에헴 허구 앉어서는, 그 한맺힌 넋두리를 끝까지 한갓지게 들어주다 말꼬리를 느슨하게 돌려선, 근디 말유 제수 씨, 좀 애매허고 속상헌 일이긴 허지먼 미치고 환장헐 일은 아닝거 같은디유?…어쩌구 하면서 휘발유를 확 뿌렸으니….'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서문 중에서)

형이 넘 아픈 사정을 함부로 어루만질 수 있는 건 그만큼 맘고생 몸 고생으로 세상을 부비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청소년기에 이미 가출해 암자 생활을 했었고, 자장면 집 보이, 나중에는 재건대 넝마주이들 틈에서 지내기도 했고 안면도에서 야학을 하면서 농어민들을 만났고 잡지쟁이로 시작한 서울에서는 본동 도시 빈민들과 어깨를 부비며 생활했던 형이었다.

형 주변에는 강홍규, 이문구, 신경림, 천상병, 김종철, 윤구병, 김성동, 송기원 등등, 유명한 문인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슬픈 서민들이 더 많았다.

'윤중호를 좋아하는 모임' 다음 카페에 '쫌보'라는 친구가 중호형이 세상을 뜨기까지 일을 했던 합정동 기획사무실의 인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중호 주변에는 언제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고달픈 형님들이 있다. 아내에게 매 맞는 남자. 떠돌이 건축노가다 등 인생 후반전을 아주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귀처럼 살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나이가 들어버린 사람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호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잠차 중호를 만날수록 그의 예민한 후각을 배웠다.'

 고 윤중호 시인
고 윤중호 시인윤중호를 사랑하는 사람들

형의 대학 은사인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은 <고향 길> 발문에 이런 글을 적어 놓기도 했다.

내가 아는 윤중호는 원래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섬세하고, 사람을 타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아이들을 매우 좋아했고, 아이처럼 소박하고 어리숙한 사람들에게 친화력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기를 원했고, 또 실지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하루 만에 800만원 어치 술값이 나가도록 몰려온 문상객들 가운데는 나와 같은 '먹물'도 물론 있었지만, 실은 하루하루 자기 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가 주로 길거리에서 지나가다 만나 소주를 나누고 그들의 살아가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시인 윤중호는 사람을 아끼는 게 제일이라는 믿음에 투철했고, 무엇보다도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 철저한 '비근대인'이었다.

- <고향길> 발문 중에서

내가 놀랐던 것은 문상객들 중에 형이 평소 싸가지 없어 했던 문인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최근 형이 시 세계를 높이고 있는 문학인들 중에는 교수입네 온갖 똥 폼을 다 잡고 다니는 형이 생전에 말했던 '싸가지 없는 인간 쪼가리'도 끼어 있을 정도다.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흔 아홉, 지금 내 나이였다. 형은 내가 죽을 때까지 마시지 못할 술을 마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형이 만난 수많은 인연들은 내가 평생을 살도록 만나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저 그런 형의 수많은 인연 중 한 명일 따름이다.

형의 수필집 <느리게 사는 사람/문학동네> '철저한 세상이 야인 강홍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세상에 살면서 향기 나는 분을 만난 것도 행운이지만 또 철저하게 세상의 금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목을 외로 꼬고 사는 분을 만나는 것도 큰 행운이다.'

형은 시대의 기인이었던 강홍규 선생을 두고 한 말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말은 형에게도 해당 되는 구절이기도 하다. 세상의 금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목을 외로 꼬고 살아가며 또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향기 주는 사람이 바로 형이었기에 내가 형을 만났던 것은 행운이었다.

나에게는 젊은 시절, 큰 영향을 준 두 선배가 있다. 중호 형과 또 다른 O선배다. 두 사람은 성격이 달랐다. O선배의 뒤에는 항상 도사라는 별칭이 따라 붙곤 했다.

사흘치 먹을거리만 있다면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던 O선배. 아주 오래 전 모 신문사에 명산 기행 연재를 하고 있던 O선배와 동행 취재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어느 큰 사찰의 주지스님을 만났다. O선배는 주지 스님에게 큰 절을 올렸다. 거기에 맞절을 하는 주지 스님의 머리는 방바닥에 땋을 정도로 더 낮게 인사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늘 낮은 자세로 임했던 후덕한 O선배 주변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리고 O선배는 가부좌 틀고 앉아 세상에 좋은 기운을 주겠다고,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나름대로 '좋은 일'들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O선배의 좋은 일들은 그저 좋은 일일 뿐 현실과 거리가 있었다. 그 선배를 바라보고 어떤 희망과 기대감으로 몰려 들어 다소 '허황된 희망' 뒤끝에 절망적으로 매달려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호 형은 그런 O선배를 안타까워했다. 좋은 마음 하나로만은 세상의 아픔을 제대로 어루만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가부좌 틀고 앉아 희망만 잔뜩 불어넣고 후배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 뒤 갈무리를 못해 주는 0선배를 못마땅해 했다. O선배는 O선배대로 중호형에게 좀 그만 마시라고 타박을 했다.

그 무렵 나는 중호 형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O선배 좋은 일을 벌여나가고 있기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은가, 못 마땅해 할 것까지 없잖은가 싶었다.

하지만 중호 형과 부대끼며 좀더 깊이 알기 시작하면서 O선배와 중호 형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호 형이 마시는 술은 그냥 술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었다. 술잔에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의 속사정을 풀어주는 끈끈한 정이 담겨 있었다.

결혼 전,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주간 신문사 일을 맡아 하던 O선배가 일손을 놓고 있는 내게 한 자리를 내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폐간 위기에 몰린 신문사 사주와 싸워 직원들에게 월급을 받아주는 자리였다. 한창 월급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O선배는 어딘가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중호 형은 달랐다. 중호 형이 국선도 잡지 <사람들>과 청소년 잡지 <세상의 꿈>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결혼과 함께 생활고를 겪고 있는 내게 형은 '세상의 꿈'이 아닌 '사람들'의 연재 코너를 내줬다. 당시 원고료도 두둑했다.

후에 알게 된 것인데 '세상의 꿈'에 원고를 실었던 문인들 대부분이 원고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형의 좋은 뜻을 알고 형과 절친한 문인들이 원고료 없이 도움을 준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시를 쓰는 후배 최은숙에게 만큼은 원고료 대신 형 자신이 아끼던 카메라를 선뜻 내줬다. '희망찬 말'보다는 '현실적인 정'이 앞선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중호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도사입네 폼 잡아가며 희망찬 미래를 내세우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남몰래 챙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형은 서울에 살면서도 '촌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현실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마음자리를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상을 '직시'했던 것 같다. 

청도계곡의 득음(得音)도, 선지식의 한 소식도 나는 알바 없다네.
그저, 먹물 장삼 스치는 소리에 얼굴 붉히는
배롱나무 꽃만 바라볼 뿐

- <고향길>운문사에서

생활전선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챙기고 다녔던 형의 삶이 그랬던 거 같다. 스스로 물기 빠진 시래기가 되어 그냥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유고집 <고향 길> '시인의 말'에 형은 다음과 같이 말을 남겼다.

'어떤 날인가, 터널터널 완행버스를 타고 오지를 지나는데 외딴집 흙담에 지난 겨울 시래기가  대롱거리고 있더라구요. 그걸 보니까(제가 원래 시래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갑자기 내가 이제껏 해온 짓들이 누추하기 짝이 없더라구요. 이렇게 살다가는 ‘따뜻한 시래기죽 한 그릇'도 못 되것드라구요.

'내가 쓴 시나 내 삶이 외롭고 허기진 사람들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되었으면 고맙겠다는 얘기지요. 우리가 아무리 잘난 척하며 살아도 결국 우리는 모두 측은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시래기)이니까, 여기서 맺은 인연을 소중하고 고마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몸 안에 있는 물기(탐욕이나 욕심 같은 것)를 지워야지만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될 수 있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본 형은 '측은하기 짝이 없는 시래기'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하지만 달마대사 그림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눈망울로 욕망이라는, 욕심이라는 물기를 쏙 뺀 시래기처럼 말라 있었다. 그리고 형은 떠났다. 형은 내게 눈물 담긴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남기고 떠났다.

유고집 <고향 길>을 새겨 읽으면서 소중하고 고마운 '따뜻한 죽 한 그릇'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나는 지금 사람들과 더불어 형이 남긴 그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꾸역꾸역 퍼 마시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형이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선배 윤재철 시인 말대로 형의 길은 '겉으로는 털털하게 느릿하게 허허실실 사는 것 같았지만 안으로 인간 구제의 방편으로 제 스스로 구도의 길을 가고자 했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의 '시래기'에는 구도자적인 깨달음의 길이 담겨 있다. 형이 삶이 그랬듯이 진흙탕 속에서 핀 화사한 연꽃 같은 '폼 나는 깨달음'이 아닌 소박하고 질박한 '시래기'의 깨달음이다.

하나의 깨달음으로 상징되는 '연꽃'과 '시래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또 다르다.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고 그저 제 깨달음인량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는 수행자들의 연꽃은 어딘가 모르게 폼이 난다. 진흙탕을 경험하지도 않고 그저 화사하게 핀 연꽃만을 통해 깨달음이 어쩌니 저쩌니 퍼질러 앉아 폼 나게 건방을 떤다.

하지만 서민들의 담벼락에서 제 몸뚱어리를 바싹 말리는 '시래기'는 폼 나지 않는다. 잘 난 척 하지 않는다. 진즉에 '측은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중생'임을 알고 있다. 폼 나지 않는 불쌍한 중생이지만 소중한 인연들과 고맙게  만날 수 있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된다. 

형은 그렇게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과 더불어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나누며 살다간 '죽 한 그릇'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형의 유고집 <고향 길> 또한 '죽 한 그릇'으로 따뜻하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형은 가고 시집만 남았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살다간 형의 시에 대한 평가는 문학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강연이 있던 날, 형의 시를 접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기도 했다.

형의 대학 은사였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은 <고향 길> 발문을 통해 형의 시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이번에 이 유고시집의 원고를 하나하나 주의해서 읽어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윤중호가 이토록 아름답고 깊고 애절한 절창(絶唱)을 남겨놓고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게는 이번 유고시집은 한국 현대시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드물게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보면 백석의 <사슴>이나 신경림의 <농무>의 맥을 잇는 세계이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그 시집들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간 진경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고 윤중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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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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