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윤중호 시인의 유고집-고향 길(문학과 지성사)
송성영
말 주변머리도 없는 촌놈이 공연히 형을 욕보이게 하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형의 유고집 <고향 길>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뭘 얘기해야 할 것인지, 형과 나의 관계는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나갔다.
형은 내게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은 그동안 내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을까?' '어떤 애정을 품고 살아왔을까?'이기도 했다.
형과 인연을 맺어 오면서 사실 나는 형의 시 세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형과 여려차례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지만 함께 찍은 사진은 결혼식 때 단체로 찍은 단 한 장이 전부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 여름날, 다쓰러져 가는 사랑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잘 익은 죽순 술이나 석류 술 단지를 비워 노래를 담아놓거나 했고 겨울에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군불을 지펴가며 형이 "그렇지 잉" 그러면 "그류"라는 식으로 세상사는 얘기를 나눴지만 시가 어떠니 문장이 어떠니 문학에 관한 얘기를 나눈 기억이 도통 없었다.
이른 아침이면 뒷산에 올라 멀리 계룡산을 바라보며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거나 했지만 호흡이 어쩌니 기운이 어쩌니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시골 생활사를 기록한 ,<오마이뉴스> 연재 글을 묶어 책을 낼 때 형이 서문을 써 주고 교정까지 봐 주었는데 그때 그런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내 글을 두고 어떤 선배가 문학적이지 않다고 하자 형이 이랬던 것이다.
"글이라는 게 빤드르르하니 잘 쓰는 거보담,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가가 중요한 거지."형과 그렇게 만났다. 글보다는 진실성으로 만났다.
그동안 형의 유고집 <고향 길>(문학과 지성사)조차 최근에 들어서야 깊은 관심을 갖고 접했다. 시집을 받은 지 3년이 되었음에도 그동안 꼼꼼하게 읽지 않았던 것은 형은 형이고 시는 시일뿐이라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형의 흔적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향 길>을 접하면 소름이 돋는다는 주변 사람들이 말이 실감이 갔다. 형의 시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혹은 본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형의 말년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율을 느끼게 했던 것은 이미 형 자신이 떠날 곳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돌아갈 곳을 알고 있습니다.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모두 돌아갈 곳으로 돌아간다는 걸왜 모르겠어요잠깐만요, 마지막 저당재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무덤가는 길만 한 번 더 보구요.이. 제. 됐. 습. 니. 다.- <고향 길> 미완유고시 '가을'언젠가 어떤 모임 뒤끝에 자정 넘은 술자리에서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엄니 한티 가야것다.""비가 너무 오는 디유.""그래두 가야겠어."형은 오래 전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서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엄니의 품속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산딸기가 무리져 익어가는 곳을 알고 있다.찔레 새순을 먹던 산길과삘기가 지천에 깔린 들길과장마 진 뒤에, 아침햇살처럼, 은피라미떼가 거슬러 오르던 물길을알고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돌아가신 할머니가, 넘실넘실 춤추는 꽃상여 타고 가시던길, 뒷구리 가는 길, 할아버지 무덤가로 가는 길한철이 아저씨가 먼저 돌아간 부인을 지게에 싣고,타박타박 아무도 모르게 밤길을 되짚어 걸어간 길웃말 지나 왜골 통정골 지나 당재 너머순한 바람 되어 헉헉대며 오르는 길, 그 길을 따라송송송송 하얀 들꽃 무리 한 움큼씩 자라는 길, 그 길 따라수줍은 담배 꽃 발갛게 달아오르는 길우리 모두 돌아갈 길그 길이 아득하다. - <고향 길1>형의 고향 길은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길이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이 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고향 길>은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길'에 관한 절절한 이야기'이며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인 것이다. 형에게 있어서 그 길은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었다.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은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아무것도 이룬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 '영목에서' 중에서'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은 또한 우리들의 고향사람들이 살고 돌아간 길이다. 그렇게 유고집 <고향 길>에는 엄니가 있고 할머니가 있다. 고향사람들이 있다. 가난하고 슬픈 이웃들, 이름없는 풀뿌리 민중들이 있다. 형의 '민중'은 윤재철 시인 말대로 '정치적이고 목적론적인 민중'이 아니다.
또한 형이 가고 싶은 <고향 길>은 마음자리이기도 했다. 형은 세상을 뜰 무렵 예전과는 달리 말수가 줄었었다. 말없이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 조성일 형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나를 보고 있지…."그런 것 같다. 형의 <고향 길>은 과거이면서도 늘 그 자리에 있는 본래의 마음자리가 아닌가 싶다.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맑고 순수한 세계. 그 안에는 삼삼한 고향이 있고 형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불쌍한 중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불쌍한 중생'은 가난하고 슬픈 고향 사람들이면서 또한 형 자신이기도 했다. 진즉에 불쌍한 중생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실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형이 잘 쓰는 말 중에 건방떨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잘난 척, 아는 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즉에 불쌍한 중생임을 알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병들고 죽는 불쌍한 중생임을 깨닫는 순간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 스스로 잘난 인간들은 잘난 것에 가려 그걸 알지 못한다. 잘난 욕망에 가려 자신의 마음자리를 볼 수 없다. 제 잘났다고 내세우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소통이 안 된다.
오래 전 형과 내가 서산 터미널 한 구석에서 곤계란에 잔술을 파는 할머니의 좌판 앞을 지나치지 못해 4박 5일을 보낸 적이 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수없이 떠나 보내고 잔술 파는 할머니 좌판에서 시작해 오늘은 누구를 불러내고 내일은 또 누구를 만나 그렇게 4박 5일을 보낸 적이 있다.
한 많은 펑퍼짐한 식당 아줌마나 잔술 파는 할머니는 고향집 엄니나 다름없다. 좌판 옆에서 잔술을 기울이는 막일꾼 아저씨들 또한 유고집 <고향 길>에 등장하는 고향 사람들이나 다름없다. 친구이고 아저씨이고 형님이다. 그렇게 가난하고 슬픈 고향 사람들을 만나면 아픈 만큼 술맛이 난다. 잘난 척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이 통한다.
곳곳이 형의 술자리였지만. 형의 술자리는 그저 취해 비틀거리는 한탄의 자리가 아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나는 자리다. 사람들의 막힌 속을 해장국처럼 기분 좋게 풀어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형은 끼지 않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친구보다는 친구 아내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늦은 밤 불청객처럼 아무개네 집을 불쑥 쳐 들어가도 문전박대할 안주인들이 없었다. 우리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고 늘 아내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밉지 않았다. 아내의 속 풀어 주는 형이 고마웠다.
"저 인간 고집불통에 승질머리가 지랄같구 생활전선에 큰 보탬이 안 돼두 거시기한 구석은 있잖유? 어떡허것슈? 제수씨가 그냥 다독거리며 데리고 살아야지." 아내의 손을 들어주되 장단이 있었다. 형의 '아내 달래기' 방식은 내 책의 발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도 내가 서방의 선배 쪼가리라구, 부인이 한바탕 피 터지게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나는 영감처럼 에헴 허구 앉어서는, 그 한맺힌 넋두리를 끝까지 한갓지게 들어주다 말꼬리를 느슨하게 돌려선, 근디 말유 제수 씨, 좀 애매허고 속상헌 일이긴 허지먼 미치고 환장헐 일은 아닝거 같은디유?…어쩌구 하면서 휘발유를 확 뿌렸으니….'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서문 중에서)형이 넘 아픈 사정을 함부로 어루만질 수 있는 건 그만큼 맘고생 몸 고생으로 세상을 부비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청소년기에 이미 가출해 암자 생활을 했었고, 자장면 집 보이, 나중에는 재건대 넝마주이들 틈에서 지내기도 했고 안면도에서 야학을 하면서 농어민들을 만났고 잡지쟁이로 시작한 서울에서는 본동 도시 빈민들과 어깨를 부비며 생활했던 형이었다.
형 주변에는 강홍규, 이문구, 신경림, 천상병, 김종철, 윤구병, 김성동, 송기원 등등, 유명한 문인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슬픈 서민들이 더 많았다.
'윤중호를 좋아하는 모임' 다음 카페에 '쫌보'라는 친구가 중호형이 세상을 뜨기까지 일을 했던 합정동 기획사무실의 인연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중호 주변에는 언제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고달픈 형님들이 있다. 아내에게 매 맞는 남자. 떠돌이 건축노가다 등 인생 후반전을 아주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귀처럼 살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나이가 들어버린 사람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중호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잠차 중호를 만날수록 그의 예민한 후각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