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중국인의 가슴마다 아로새겨진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율성.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낸 조국인 한국에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의 2백만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추앙을 받고 있는 작곡가다.
정율성은 조선인이면서도 1937년 이후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과 탁월한 음악적 업적으로 최고의 중국음악인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 첫 프로그램과 2000년 6.15 공동선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만남에 울려 퍼진 곡이 모두 그의 곡이었다는 사실은 중국과 북한에서의 그의 음악적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항일독립투쟁, 국가건설, 문화혁명 등 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속에서 혁명성 짙은 작곡으로, 때로는 침묵의 저항으로 일생을 보낸 그는 1914년 광주시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주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그만둔 정율성은 1933년 봄 셋째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1934년 의열단의 남경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곳에서 항일비밀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매주 일요일 상해로 가 러시아의 저명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을 배우게 된다. 교수로부터 이탈리아에 가서 계속 공부할 것을 권유 받지만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정율성은 1937년 10월 연안으로 옮겨 노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 연안에서 모든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팔로군행진곡’, ‘연안송’ 등 주옥같은 음악을 남기게 된다.
특히, 힘차게 시작되는 ‘팔로군행진곡’은 큰 사랑을 받으며 군가로 채택됐고 1988년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정식 ‘인민해방군군가’로 비준을 받게 된다.
외국인으로서 불가피하게 갖게 되는 음악적 언어전달의 어려움을 그는 한국인의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중국인민의 모든 것을 몸소 체득하고 배움으로써 극복했던 것이다.
1966년 작곡, 공연 등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된 문화혁명기간 마저도 정율성의 불타는 창작열을 끝내 꺾지 못했다. 그는 이 기간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 이라고 불리는 마오쩌둥시사 20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완성하게 된다.
대자연을 한없이 사랑하고 노래한 그는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1976년 12월7일 베이징 근교의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길지 않은 파란만장한 예술적 삶을 마감하게 된다.(정율성 국제음악제 홈페이지 자료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