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뒤바뀐 처방

[역사소설 소현세자 119] 시기도 맞지 않은 계절병

등록 2008.11.12 10:53수정 2008.11.1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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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인왕산에 걸린 태양
인왕산. 인왕산에 걸린 태양이정근

인왕산에 해가 걸리고 땅거미가 궁궐에 내려앉았다. 이형익이 후궁전을 나와 금호문을 빠져 나가는 거의 같은 시각. 궁에 돌아온 소현을 대전 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저하! 전하께서 찾아 계시옵니다."
"어둠이 내리는데 괞찮겠느냐?"


궁궐의 공식적인 업무는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일출과 일몰이 기준이었다.

"환궁하시는 데로 모시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내관을 앞세운 소현이 양화당을 찾았다. 병석에 누워 있어야 할 인조가 꼿꼿이 앉아 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훈련이라도 시키고 돌아왔단 말이냐?

"아바마마! 소자이옵니다."


세자와 임금 간에는 두 가지 관계가 있다. 부자지간과 군신간이다. 공적인 업무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사적인 시간으로 생각했다.

"과인의 허락도 없이 세자가 궐 밖으로 나가도 된다더냐?"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세자를 아들로 본 것이 아니라 신하로 본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그래, 어디를 다녀왔느냐?"

"삼전도와 남한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산성에 가서 군사들 훈련이라도 시키고 돌아왔단 말이냐?"

인조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옵니다. 마마!"
"군사훈련이 아니면 뭐 하러 산성에 갔더란 말이냐?"

"그날의 치욕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기 위하여 다녀왔습니다."
"듣기 싫다. 그들에 대한 적개심은 심양에서 쌓았으면 됐지. 무슨 삼전도란 말이냐?"

삼전도.  송파구 삼전도에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는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엎드려 있는 사람이 인조 임금이고 바로 뒤에 서있는 사람이 소현세자다.
삼전도. 송파구 삼전도에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행하는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엎드려 있는 사람이 인조 임금이고 바로 뒤에 서있는 사람이 소현세자다. 이정근

인조에게 삼전도는 치욕의 땅이다. 거론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지명이다. 꿈에서도 가위 눌리는 악몽의 장소다. 조선 건국 250년. 오랑캐에게 항복한 선대왕이 있었던가? 자신이 유일하게 항복한 군주라 생각하면 그 수모는 뼈 마디마디에 파고들었다. 그러한 땅을 세자가 다녀왔다는 것은 자신을 능멸하는 것만 같았다.

"황공하옵니다."

소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소현을 노려보던 인조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호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많다고 말들이 많다."
"전하! 그것은 오해이십니다."

"무엇 무엇이냐?"
"북경에서 구왕이 준 귀국선물과 서양인 천문대장의 선물, 그리고 심양에서 질가왕의 선물이 전부입니다."

"일국의 세자가 신하들의 입에 오르내려서야 되겠는가?"
"황공하옵니다."

"세자가 받은 선물은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 호조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동궁으로 돌아온 소현은 채단(彩段) 4백 필과 황금 19냥을 호조로 돌려보냈다. 청나라에서 받은 선물을 몽땅 내놓은 것이다.

젊은 사람이 저녁 잘 먹고 갑자기 병이 났다. 왠 일?

저녁 식사를 마친 소현이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달렸다. 고열을 동반한 예사롭지 않은 증상이었다. 세자가 급환에 시달린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어의 박군(朴頵)으로 하여금 동궁에 들어가 진맥하도록 했다. 진맥을 마친 박군이 동료 어의들과 함께 양화당으로 향했다.

"세자의 병이 무엇이더냐?"
"학질입니다."

어의 박군이 자신 있게 말했다. 학질이라면 오늘날의 말라리아와 임상증세가 흡사하다. 3일마다 견디기 어려운 고열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삼일거리와 4일마다 찾아오는 사일거리가 있는 일종의 열병이다. 열이 심하면 발작을 일으키고 정신이 혼미해질 수 있으나 뇌형 말라리아를 제외하고는 치사율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

병원균을 옮기는 매개체는 학질모기다. 때문에 계절성 질환이다. 모기를 숙주로 한 학질원충이 자라는데 필요한 25도 이상의 기후가 2주 이상 지속되어야 전파될 수 있다. 동의보감에도 '여름철 더위에 상하면 가을에 학질이 생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개원인자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도 계절병으로 분류했다. 소현의 발병 시기는 4월 하순이다. 사진(四診)과 안진(按診)이 진찰의 전부였던 당시의 상황으로 오진일 수도 있다.

"무슨 약을 쓰면 되겠는가?"

"학질에는 열이 많은 풍학(風瘧), 오한이 심한 한학(寒瘧), 비를 맞거나 습사가 침벌하여 발작하는 습학(濕瘧), 고질병이 된 노학(老瘧), 열도 오한도 미지근한 해학(解瘧), 산골 시냇가에서 생긴 장학(瘴瘧) 등이 있는데 쌍해음자, 지룡음, 강활창출탕, 장달환, 관음원을 쓰면 효험이 있습니다."

동의보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의보감.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정근

어의 유후성이 동의보감의 처방을 열거하며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질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탕약을 준비하도록 하라."

왕명을 받은 어의 박군과 유후성이 물러난 직후, 약방제조 김자점이 들어왔다. 병자호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김자점은 소용 조씨의 뒷배로 되살아나 승승장구하고 있는 인물이다.

"세자의 질환에는 침이 특효일 것 같습니다."
"침이라 했소?"
"내, 전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하! 전하의 병환에도 침이 효과 있는 것으로 보아 세자에게도 침을 놓도록 하소서."

곁에서 잠자코 있던 소용 조씨가 침의 효용가치를 들고 나왔다. 그동안 인조는 줄기차게 침을 맞고 있었다.

"세자에게 침을 놓도록 하라."

탕약은 취소되었다. 양화당을 물러나온 약방제조 김자점은 급히 이형익을 찾았다.

"세자 저하에게 침을 놓아라."

이형익에게 명했다. 이형익은 공식 어의가 아니다. 대흥동 소용 조씨의 친정집을 드나들던 시골의원이었다. 조 소용의 천거로 궁에 들어온 이형익은 내의원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침 하나로 세력을 휘어잡은 사람이다. 이형익이 소현에게 침을 놓기 시작한 바로 그날 밤. 밤하늘에서는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고 경상도 칠곡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학질 #어의 #사진 #김자점 #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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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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