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암문.평소에는 돌로 막아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 산성의 비상구다.
이정근
소현세자가 대궐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조 소용이 동궁전에 심어둔 첩자를 통하여 즉각 소용 조씨에게 알려졌다.
"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갔군. 아냐, 굴속이 아니라 입속이야, 아예 날 잡아 잡수셔군,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산성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주상을 몰라서 그러나? 알면서 그랬다면 순진해, 청국의 주구노릇이나 하던 이런 철부지가 돌아와 왕이 되겠다니 어림없는 소리야."
조 소용의 얼굴에 조소가 흘렀다.
"지난번 옥사에 심기원 일당이 일망타진되었다고 김자점이 보고했지만 아직도 그 잔존 세력이 남아 있는지 몰라. 산성은 음험하잖아, 녀석이 세를 얻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해. 암 그렇구 말고."지난 해 6월이었다. '영남에서 두 패의 무리가 올라와 삼전도를 건널 것이다. 미리 배를 마련해 두었다가 일시에 건너 주도록 하라. 이는 수어사의 분부이고 총융사도 아는 일이다' 라는 괴문서가 산성에서 발견되었다.
인조에게 삼전도는 치욕의 땅이었고 산성은 반역의 땅이었다반란을 암시하는 이 문서를 발견한 광주부윤 홍진문은 조정에 보고했으나 즉시 치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되치기 당하여 추국당하고 수어사 이시백이 물러나는 소동을 겪었다. 이 사건으로 인조는 남한산성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일어났던 심기원의 역모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기원과 모의할 때 '거사가 성공하면 우선 중전에게 수렴청정 하도록 청하고 사신 한 사람을 심양에 급히 보내 청나라에 간청하여 세자를 귀국하게 한다면 명분이 서고 논리도 합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심기원 옥사에 연루된 권억의 공초를 받아든 인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던 것을 조 소용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심기원은 남한산성 수어사였고 권억은 광주부윤이었다. 회은군 이덕인을 옹립하려던 심기원과 그 일당이 복주되었는데도 괴문서가 발견되니 인조는 산성을 반역의 땅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퇴출된 고물을 깨끗이 닦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이럴 때 쓰려고 했지 않았는가."조 소용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병자호란의 책임을 지고 퇴출되었던 김류가 호위대장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있다. 당시 서로군 도원수로 청나라의 침공을 수수방관했던 김자점은 처형 위기를 모면하고 중도에 유배되었다. 우직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 여인에 의해 강화유수에 천거된 김자점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불과 4년 만에 호위대장, 병조판서, 우의정으로 고속 승진했다.
"그를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은 장식품이 아니야."조 소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성혼(成渾)의 문생으로 조정에 출사한 김자점은 병조에서 잔뼈가 굵은 무골 통 문인이었다. 그가 어영청 수장을 거쳐 내의원 도제조를 꿰차고 앉아 있다. 환상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자리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다. 소용 조씨가 공을 들인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