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사람이 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설을 읽다니. 근래까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곳인가. 현대사의 대부분이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얼룩진 곳,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탈레반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 하얀색 또는 검정색 부르카에 몸을 감춘 여자들이 암울하게 살아가는 곳, 싱싱한 풀 한 포기 변변한 나무 한 그루 보기 어렵고 회색빛 사막과 황토색 산악이 국토의 대부분을 뒤덮은 곳, 무엇보다 지난 40년 동안 나랑 그 어떤 인연도 맺은 적이 없는 낯선 사람, 낯선 나라. 이런 나라에 대한 소설이 있으리라고 예상도 못해봤으니 그런 책을 읽었을 리 없다. 분당샘물교회 단기봉사팀이 탈레반에게 납치되고 두 사람이 생명을 잃는 참극을 목격하고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현대문학)은 어떤 사전 정보나 자료도 갖지 않은 채 인터넷 서점을 어슬렁거리다가 고른 책이다. 그러나 우선순위에 밀려 몇 달 동안 책장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책장에 읽지 않은 책들의 권수가 좀체 줄지 않는데도 새 책 주문하기만 즐기는 매우 좋지 않은 버릇을 반성한 덕분에 이 책은 드디어 햇볕을 보고 주인의 손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됐다.
600쪽 가까이 되는 분량의 4분의 1가량을 읽을 때까지는 약간의 인내력이 동원됐다. 며칠 걸려서 책의 한복판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 듯했다. 중반전을 넘어서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만나는 순간부터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더니, 하룻밤을 꼼짝없이 새워서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심장은 여전히 벌렁거렸다.
두 여자가 남편 라시드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때의 아픔, 라일라가 딸과 고아원 입구에서 헤어질 때의 슬픔, 잔인한 남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도망치려다가 잡힐 때의 긴장감, 마리암이 남편을 죽이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때의 안타까움, 라일라가 원래 애인 타리크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의 안도감. 까만 밤을 하얗게 새우는 동안 내 감정은 하늘 높은 곳과 땅 깊은 곳을 몇 번이나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초반전의 불성실을 반성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갔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평이나 더 자세한 자료를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수백 개의 서평은 나의 무식을 꾸짖고 있었다. 이 책은 작년에 출간되자마자 단숨에 <해리 포터>를 누르고 <뉴욕타임스>와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책은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의 첫 작품이 아니었다. 저자는 2003년에 이미 <연을 쫓는 아이>라는 소설을 첫 번째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 소설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지금까지 4년 동안 5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영화로도 제작됐다고 하니, 내 어찌 세상 돌아가는 꼴에 이다지도 둔감하단 말인가. 서둘러 DVD를 사서 봤다.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는 오늘 아침 텔레비전 채널을 CNN에 맞추거나 <뉴욕타임스>를 펼치는 순간마다 만나게 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생생한 현대사, 그리고 우리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사람 사람의 가족사와 개인사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그리고 두 책에는 각각 여자 주인공들과 남자 주인공들의 깊은 우정,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사람들과 남아 있는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의 대비가 균형 있게 이루고 있다. 둘을 함께 읽는 게 좋다.
어린 나이에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소련의 침공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저자는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최근 몇 년 새에 두 개의 소설을 연속해서 내놓았고, 지금은 난민들을 돕는 NGO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두 작품에서 저자의 복잡한 심정은 비교적 쉽게 드러난다. 저주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 축복의 땅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부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저자는 <연을 쫓는 아이>에서, 주인공 아미르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이자 배다른 형제인 하산의 아들(그러니까 자기의 조카인 셈이다)을 탈레반의 손아귀에서 빼내 미국으로 데려오도록 한다. 두고 온 형제와 자매와 친구에 대한 부담감을 이렇게라도 씻어내고 싶었을지 모른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는, 9․11 사건을 보복하기 위해 부시 미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다. 타리크가 무심중에 라일라에게 “그리 나쁜 건 아닐지도 몰라”라고 말한다. 라일라가 질겁하자, “내 말은 어쩌면 이번 전쟁이 끝나면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였어”라고 설명한다. 내 나라 한복판에 미국의 폭격이 쏟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탈레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망명자의 아픈 마음이 묻어 있다. 그러면서도 라일라를 빌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누군가에게 일어나고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프간 아이들이 자신처럼 로켓탄에 의해 고아가 되는 상황인데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고도 한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공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조국, 미국의 이번 침공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고통스런 희망. 저자의 이런 심란함은 두 소설의 단순한 줄거리 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우리의 애간장도 덩달아 태운다.
이 책이 나에게 주는 가치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이슬람권 사람들의 문화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왕은철의 얘기를 들어보자.
“탈레반이 우리나라 교인들을 납치하면서 온 나라가 들썩들썩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을 중간쯤 번역한 상태였다. 그 납치 사건은 이슬람 문화와 종교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다른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 조그만 겸손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다. 다른 문화에 대한 몰이해, 타자에 대한 몰이해는 물리적 폭력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인식론적 폭력이라고 나는 배웠고 또 그렇게 가르쳐왔다. 다른 문화와 민족, 그리고 다른 종교에 언제나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서 얘기해주는 좋은 교과서였다.
이 소설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의 비극적이고 찬란한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향유하고 또 그것에 시달려온 사람들에 관한 많은 걸 무식한 나에게 깨우쳐줬다. …… 소련의 침공 이전의 평화로운 시기에서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의 파란만장한 아프간 역사를 아우르고 그 역사를 살아야 했던 아프간 사람들의 눈물과 사랑과 염원이 녹아들어 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좋은 출발점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옮긴이의 견해, 다른 종교와 민족에 대해서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는 대목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겸손한 태도 내지 이해 여부와 이번 납치 사건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종교, 다른 문화, 다른 역사를 가진 이들에 대해 몸을 낮춰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강조한 부분은 백분 동감한다. 걸핏하면 ‘단일민족’을 자랑하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우리나라 국민들, ‘유일사상’을 내세우면서 다른 종교 사람들을 조롱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필요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데, ‘사람이 살고 있다’는 바로 그 평범한 사실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적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이들만 득실대는 곳이 아니다. 기독교도들의 적 이슬람교도들만 바글대는 곳이 아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이빨이 부러지는 폭력을 견디고, 전쟁 때문에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고, 부모에게 섭섭하게 대했던 것을 철들어 후회하고, 차를 마시고 시를 읊조리면서 잠시나마 행복한 짬을 즐기기도 하는, 나와 당신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미치도록 사랑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내 목숨 던져도 아깝지 않게 여길 만한 독실한 기독교인이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느끼며 뭐라고 썼을까 궁금해서 마우스를 부지런히 클릭했다. 손목 힘줄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사역’보다 ‘사람’을 사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을 품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글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