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면 '면피'는 했다고?

[책] <이성의 위기>

등록 2009.01.31 19:30수정 2009.01.3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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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성의 위기> 표지

<이성의 위기> 표지 ⓒ 중앙 books

<이성의 위기> 표지 ⓒ 중앙 books

 흔들리는 미국 민주주의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태풍 피해나 테러 위협의 경고가 뜨면 행정부의 수반은 어떻게 반응을 할까?

 

놀랍게도 긴급회의가 개최되기는 하지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조국에 대한 임무를 충분히 완수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는 놀라운 고백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기도 한 부통령 앨 고어의 입에서 나왔다.

 

그나마 클링턴 대통령 시절에는 상식선에서 열던 회의마저 부시 행정부 시절엔 회의소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보고를 한 CIA요원을 쫓아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아. 그 정도면 자네 면피는 했어(you've covered your ass now)"

 

저 글을 읽는 순간 내 뇌리에는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떠올랐다. 용산 희생자 가족들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경찰의 최고 수뇌는 면피를 한 상황이고 그대로 직분이 이어질 전망이다.

 

<이성의 위기>를 쓴 엘 고어는 미국의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지만 시청자들이 직접 만드는 콘텐츠와 시민저널리즘에 토대를 둔 케이블 및 위성네트워크, ‘애플 컴퓨터’ 이사 ‘구글’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이성을 토대로 한 민주공화국 이념을 저버리고 대통령 권력을 강화시키며 특권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친 부시 정권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9.11 테러 사건을 빌미로 이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해 온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일부터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고문을 방조하는 일, 교토 협약을 무시하며 환경파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일까지 균형 잃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균형과 견제의 기능을 상실한 채 거대해진 행정부는 거대 기업과 밀착하여 국민의 생존권과 알권리를 박탈한다. 이성의 시대는 가고 권력욕과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얼마든지 예견하고 예방 할 수 있는 테러의 위협을 핑계로 공포정치를 정당화 한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어떤 문제든 이성적인 합의를 끌어 낼 수 있다는 보편적인 전제는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의 나약함 앞에서 무가치한 것이 된다.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감정과 동기와 욕망의 도가니에 의해 지배되고, 우리가 의식적인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다른 이유 때문에 한 행동을 사후에 합리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지배하는 또 다른 심리적 구조들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이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논리와 이성이 미치는 영향보다 훨씬 더 크다. 또한 이성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보다 감정이 이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크며, 특히 그것이 공포의 감정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수많은 정치인들, 특히 아집과 굴절된 영웅의식이 강한 정치가일수록 개인이 지닌 두려움을 자극하는 공포를 미끼로 권력을 행사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대다수 시민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그것을 정치적 미끼로 이용한 대표적인 사람이 조지 부시다. 독재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극우파적 사고를 종교적 정파나 철학적 신념으로 위장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그토록 번번하게 사실에 바탕을 둔 분석을 외면하는 것은 성경보다는 우파로서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더 큰 연관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종파가 정파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2백 년도 넘은 제임스 매디슨의 경고를 언급한 바 있다. 지금 급진적인 우파들은 종파로 위장한 정파로 행세하며, 그것을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다.

 

정말 신기한 것은 부시가 맹목적인 종교적 신앙을 이용해 실제로는 사회 정의를 경멸하는 극단적인 정치철학을 숨기고 있다는 점인데,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신앙적 전통의 기준에 비춰 봐도 그것은 신앙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부시의 망령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국 대통령

 

부시 행정부가 시행한 정책은 오로지 개인의 정치적 야망과  욕심에 가득 찬 거대 기업과의 끈끈한 연대로 이루어졌다.

 

전 지구적으로  빨간불이 켜진 환경파괴와 오존층 파괴를 외면하는 정책, 상태계와 자연을 보존하기 위한 보호구역에 시추공을 박을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일, 특화된 통치 계급이 내린 판단을 선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언론 장악, 안전과 보호를 핑계로 발가벗겨지는 개인의 권리, 거대해진 행정부에 반해 무력해진 입법부와 사법부, 국민 전체 대신 소수 거대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경제정책 등이 부시 정권이 수행한 정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앨 고어가 한국의 현 정책을 말한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한국 정부의 현 정책은 부시의 정책 방향과 흡사하다. 국민의 알권리를 박탈하는 언론 장악, 부시가 했다는 TV와 라디오를 통한 공포 조장과 세뇌, 가진 자들의 부를 극대화시켜 줄 개발, 줄어 든 사회복지 등이 대한민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개인을 압수 수색 동행 요청을 하기위해서는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며, 시민들은 수색, 체포 당하지 않을 권리를 누렸다고 한다. 그 전통을 깨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부시 전 대통령이다.

 

몇 년 전부터 연방 요원들은 애국법에 따라 테러리즘과 무관한 경우에도 “몰래 들어가서 훔쳐보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비밀리에 당신의 집으로 들어가-당신이 집에 있건 없건- 그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몇 달 동안 버텨도 된다. 반드시 테러리즘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그런 수색 작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온갖 잡다한 범죄 행위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게다가 새로운 법에 따르면 전통적인 영장을 발부받기도 아주 간편해졌다.

 

촛불문화제 때 길 위에 서 있던 시민이나 시민연대에서 만든 티셔츠를 입었다고 경찰서로 끌려간 지인을 보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민주주의를 100년이나 후퇴시킨 부시를 통치자의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앨 고어가 염려하는 기존매체에 중독된 대다수 미국시민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두려움과 경제 디아스포라의 망령이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겨 연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위기의식에 맞서 싸우기 위해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궁구하다 이미 3천 년 전 솔로몬이 경고했다던 ‘전망 없는 나라의 국민들은 멸망할 것이다’라는 경구가 떠올랐다.

 

이제 우리는 눈과 귀를 크게 열고 법이 법의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나라, 헌법에 명시된 대로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그날까지 희망의 촛불을 밝혀야만 할 것이다.

2009.01.31 19:30ⓒ 2009 OhmyNews

이성의 위기

앨 고어 지음, 안종설 옮김,
중앙books(중앙북스), 2008


#이성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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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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