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善終)'이란 낯선 단어를 듣고야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개신교도인 나로서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특별한 감회나 감정이 없다. 하지만 그의 민초를 생각했던 평소의 사역들이 생각나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때는 항상 억압받는 국민의 편에 서 있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고 다시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기도 했는데, 결국 남들이 다 가는 그 길을 간 것이다. '선종'이란 '선생복종(善生福終)'에서 나온 말로, '착하게 살다가 죄가 없이 복되게 생을 마쳤다'는 뜻이다. 임종할 때 고해성사를 받아 대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말하는데 가톨릭에서 주로 사용하는 '죽음'에 관한 표현이다. 불교의 '입적'이나 개신교의 '소천' 등과 같은 뜻인 듯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가면서도 안구를 기증하여 두 명에게 빛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받아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그저 잠깐 그러는 것으로 끝날까 걱정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애도행렬을 보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고 간 숙제를 생각해 보고 싶다. 냄비근성과 자연스런 죽음에 대한 것이다.
고 최진실과 고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자 매스컴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삶의 자취들을 알려주느라 부산하다. 가신 분의 뒤는 항상 멋지고 아름다운 법, 이런 코드에 모든 매스컴이 입을 맞춘 듯 고 김수환 추기경을 찬양하고 있다. 심지어는 외국의 언론들도 이 운동에 가세하고 있다. 어떤 전임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큰 별이 가셨다'고 애도의 뜻을 밝혔다.
나도 좋은 분의 이별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정치인이 되었든, 종교인이 되었든, 좋은 분을 잃은 아픔을 말하고 그분을 기리는 것에 대하여 딴지 걸려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난 왜 자살한 고 최진실의 장례식 때 떠들썩하던 매스컴의 행태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제발 그런 것은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한번 떠들썩하다 사라지는 그런 냄비근성이 이번에도 활개를 칠까 두렵다.
지난해 10월 고 최진실이 자살하자 온 나라가 패닉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국민배우가 죽었다고 했다. 맏언니가 죽었다고 했다. 댓글의 희생양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악성 댓글(악플)을 방지하는 법을 만들자고도 했다. 최진실의 아까운 죽음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도 했다. 그의 죽음 이후 장례식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매스컴은 그녀의 가는 길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큰 별'이란 무슨 뜻일까? 연예인을 '스타'라고 부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의미일 게다.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인기를 누리는. 그러다가는 인기가 삭아들면 아무도 안 알아주는…. 그러나 고 김수환 추기경은 대중스타가 아니다. 한 동안 스타처럼 부상한 적도 없고, 그가 가끔 쓴 유머가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적은 있었어도 분명 인기 스타는 아니다.
그럼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 '큰 사람'이란 뜻일 게다. 그렇다. 분명히 고 김수환 추기경은 큰 사람이다. 큰 그릇이다.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큰 사람이 아니라, 대중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할 줄 알았기에 큰 사람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그런 의미를 생각하고 쓴 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별이 아니다. 가신 분도 노여워할 표현은 그에게 적절하지 않다.
요즘 TV뉴스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소식이 대부분의 시간을 점령하고 있다. 고 최진실의 장례식 때 그랬듯. 이미 방송사에서는 20일 있을 장례식을 생중계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그분을 지칭하여 '큰 별'이라고 하는 것과, 국민들이 고 최진실을 '국민배우'라고 하는 것이 그리 닮아 보일 수가 없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이리도 뻑적지근한 장례식을 원했을까. 고인의 뜻에 따라 조촐한 장례식을 치를 것이라는 장례주관 신부의 말이 이뤄지게 하는 게 국민 된 도리가 아닐까. 냄비근성 말고 성숙한 눈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드리고 유훈을 따라야 한다.
자연스런 죽음에 대한 숙제
좀 생경하다. 영화에서는 본 적이 있지만 시체를 보여주는 가톨릭식 장례가 이채롭다.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 둥근 유리관 안에 누워있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은 조문객을 위한 것이란다. 주검이 부패하지 않게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고 조문객들이 친근하게 고인을 추모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혹 이런 장치가 대부분의 '스타'들이 그렇듯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그분의 뜻을 기려야 한다. 난 그분의 아름다운 삶도 삶이려니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참 맘에 든다. 현대의학이 고안해낸 생명 연장 장치를 거부했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9월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 소화기내과 정인식 교수에게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떤 조치도 하지 말라"며 "인공호흡기도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는 이어 "절대 나를 특별 대접하지 마세요"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부탁은 의사로서는 지키기 힘든 부탁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연명 치료 중단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주교 교구청이 정 교수의 공증요구를 들어줬다. 정진석 추기경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톨릭은 자연스런 죽음에 대하여 호의적이다.
'자연스런 죽음'이라고 한 내 표현은 달리 말하면,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 '행복하고 품위 있는 죽음', '고통이 없는 빠른 죽음', '잠자는 것과 같은 평화로운 죽음', '가벼운 죽음', '깨끗한 죽음' 등 다양한 표현으로 말할 수 있다. 이미 사법부는 "인간의 존엄성이 생명권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서도 구현돼야 하는 궁극적 가치"라며 '존엄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었다.
고 김 추기경은 '사람은 났으면 죽는다'는 극히 기본적이고 자연스런 원리를 무시하는 의학적 처사에 반기를 든 셈이다. 김 추기경의 죽음을 계기로 수를 다한 이의 생명을 연장하는 무의미한 일은 없어야 한다. 다행스런 것은 지난 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신상진 의원 등 20명이 존엄사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루 속히 자연스런 죽음에 대한 법적 장치가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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