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작은 새 한 마리가 소년에게 날아왔습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작은 새는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작은 새는 매일매일 소년에게 날아와 친구가 되어 노래를 불러주고, 그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주문처럼 부르는 노래, 그러나 여름이 가고 늦가을까지 무지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이 왔습니다.
둘은 꼬옥 껴안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 본 겨울바람이 시샘을 했습니다.
겨울비가 내린 어느 날, 작은 새와 소년의 너무도 간절한 노래 소리를 듣고 무지개가 하늘 높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겨울바람의 시샘으로 무지개는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얼음무지개가 된 것이지요. 무지개가 꽁꽁 얼어붙을 만큼의 찬바람은 소년과 작은 새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소년과 작은 새는 꼭 껴안고 얼음 속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소년과 작은 새가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얼음 속에서 잠이 든 소년과 작은 새는 꿈을 꾸었습니다. 작은 새를 타고 하늘을 훨훨 날아가다 무지개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꿈 속에서도 무지개는 만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소년과 작은 새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 몸이 꽁꽁 얼어 붙어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끼리는 마음이 통하는 법이거든요.
"작은 새야, 너도 나와 같은 꿈을 꿨니?"
"응, 나도 너와 같은 꿈을 꾸었어."
"그런데 그 아픈 순간이란 어떤 것일까?"
"글쎄……. 무지개가 그것을 말해주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듣질 못했어."
"나도 그런데……."
잠에서 깬 후 소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을, 작은 새는 날갯짓 한번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잠들어 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얼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새가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나, 날갯짓을 한번 해보고 싶어."
"그런데 날갯짓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잖아."
"네가 조금만 움직여주면 안 될까?"
"나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걸."
서로에게 뭔가를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서운해지고, 서운해짐으로 서로에게 아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처음 알았습니다. 소년은 이런 것이 아픔인가보다 생각하면서도 이내 그토록 사랑했던 이가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했다는 것이 작은 상처가 되었고, 작은 새는 정말 움직여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날갯짓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그것을 상처로 안고 살아가는 소년으로 인해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상처,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큰 아픔의 시작일지 몰랐습니다.
소년이 말했습니다.
"나, 마음이 아파. 너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아파. 난 그저 내 소망을 이야기 한 것뿐인데 상처가 되어서."
"상처? 그래 맞아. 너는 내게 상처를 주었어."
"……."
작은 새는 소년을 사랑한 후 처음으로 "너는 내게 상처를 주었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끼리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새는 그만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소년도 솔직하게 자기의 맘을 전했지만 그것은 숨겨둘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따스하고 포근하던 소년의 품, 그렇게 사랑스럽던 작은 새의 콩닥거리는 심장소리는 이제 더 이상 포근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게 느껴졌습니다. 서로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이젠 더 이상 함께 껴안고 있을 이유도, 같은 노래를 부를 이유도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겨울은 깊어만 갔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지만 이젠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얼음 속에 갇혀 있기에, 서로 체온을 나누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젠 서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이죠.
'사랑, 아픔' 모두를 겪기는 했지만 아직 그것을 하나로 만들지 못했고,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 순간 그동안의 사랑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영영 무지개가 되는 꿈은 멀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소년과 작은 새를 얼음 속에 잠들게 했던 겨울바람이 또다시 그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무지개야 나오너라. 무지개야 나오너라. 노래를 부르고 있나?'하며 얼음 속을 들여다 본 겨울바람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저 얼음 속에서는 그 마음도 차가워질 수밖에 없지. 그나저나 이제 겨울도 막바지에 접어드는데 어디 또 얼음 속에 가둬놓을 만한 것이 없을까?'
겨울바람은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를 남기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겨울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눈꽃이 피어 햇살에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그 작은 눈꽃이 아침햇살을 받아 작은 물방울이 되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순간 작은 무지개가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햇살을 받아 하나둘 나뭇가지마다 무지개를 걸어놓은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또 꿈인가 싶었습니다.
"작은 새야, 일어나 보렴. 저기 무지개가 많아!"
작은 새는 소년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습니다.
"무지개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네."
날갯짓을 한 번 하기만 하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지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무지개였지만 둘은 아직도 얼음 속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의 심장소리는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아졌고, 소년의 절름발이 다리도 얼어서 다시는 걸을 수 없는 것만 같이 야위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냥 너무 오랫동안 얼음 속에서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소년은 이제 품안의 작은 새의 심장이 곧 멈춰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품안의 작은 새, 함께 무지개야 나오너라. 노래를 불러주었던 작은 새, 진심으로 사랑했던 새, 얼음 속에서도 추운 줄 모르고 같은 꿈을 꾸며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미안해……."
그러나 서로 사랑하지 않은 지 오래 되어서 그 말은 작은 새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작은 새도 사랑하는 이도 없는 세상을 놓아버리는 것에 대해서 미련이 없었는데 함께 무지개야 나오너라. 노래를 불렀던 소년, 진심으로 사랑했던 소년, 얼음 속에서 그나마 추운 줄 모르고 소년의 품에서 지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작은 새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상처를 주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소년의 품에 안겨 있기는 했지만 따뜻하기보다는 슬프고, 외로웠던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소년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미안해……."
그러나 역시 작은 새의 이 말도 소년에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미안해……" 하는 말이 서로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안 작은 새와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물이 이 얼음을 녹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서 내 품에 있는 작은 새가 죽기 전에 날갯짓 한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내 눈물이 이 얼음을 녹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레서 소년이 무지개를 만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그래, 너희들 다시 사랑이 시작되었구나. 그리고 이젠 아픔들도 이겨낸 듯하고."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겨울바람은 오는 봄바람을 더 이상은 막을 수가 없어 겨울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따스한 봄바람 타고 바람꽃들이 깊은 숲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했고, 깊은 숲뿐만 아니라 온 들판 여기저기에도 봄꽃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바람꽃으로 시작된 어느 봄날 따사로운 햇살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습니다.
그리고 단비가 내린 어느날 그들이 있는 곳에서 무지개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 다리를 사박사박 걸어가는 작은 소년과 새를 보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동화는 하덕규 님의 <얼음무지개>라는 노래를 소재로 한 동화입니다.
2009.04.27 17:2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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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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