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성풍속
가림기획
남녀칠세부동석과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성생활을 했을까? 그들은 어떤 성풍속과 성문화를 만들었을까? 궁금하다면 조금 오래 된 책(1998년)이지만 정성희가 지은 <조선의 성풍속>에서 우리는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조선의 성풍속>에는 결혼·임신·이혼·수절·성범죄·간통·매춘 따위를 통하여 조선시대 성풍속과 성문화를 알 수 있다. 조선 초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린 남존여비와 같은 불평등 사회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 결혼 풍습에서 '시집살이'가 아니라 '처가살이'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며느리가 시부모 얼굴도 못 보는 형편이다"라는 말까지 유행했는데 이는 며느리가 시가가 아니라 친정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 시집살이는 2백년도 안 된 결혼 풍습일 뿐이다.
하지만 유교가 조선시대 이념을 자리잡으면서 '남녀칠세부동석' '남존여비'가 여성들 삶을 옥죄었다. 양반집 여성들은 바깥 나들이 자유를 제한 받았으며, 불효 중에 후손이 없는 일이 가장 불효라는 사상은 결국 대를 잇는 숙명을 떠안도록 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아들 낳은 집 금줄을 일주일 동안 차고 다니거나, 고추있는 금줄을 훔쳤으며, 상가집 상여 만장을 상주 몰래 찢어서 속곳을 해입었다. 경북 안동에서는 우물이나 냇물에 세로로 떠 있는 작은 나무토막이나 마디가 있는 짚토막을 물과 함께 마시면 아들을 낳는 '공구 뜬 물 마시기'라는 풍습까지 있었다. 심지어 "뒷간의 똥물이라도 마실 정성이 있어야 아들을 보는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니 조선시대 여성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여성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 중 하나를 어겼기에 언제든지 버림을 받을 수 있었지만 부인들이 남편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욕설만 해도 이혼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수절은 여성이 가야 할 길었으며, 재가도 금지되었다. 왜 조선은 재가를 금지했을까? 정성희 설명을 들어보자.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대개 전남편 집에 두고 가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 재가하는 여성이 자녀를 데리고 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재가는 자식이 어느 아버지의 성씨를 따를 것인가 또는 어떠한 상복을 입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남자 위주의 가계계승에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듯 여성들의 재가 금지는 가계계승에 있어서 순수 혈통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여성의 정절은 단지 구실일뿐이었다."(122쪽) 순수 혈통을 위해 재가까지 금지했던 조선 양반네들은 부인만 평생 사랑하고, 함께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기녀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기녀들을 허용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아내 없는 변방 군사들을 위해서"였다.
기녀들과 함께하니 스캔들도 일어났다. 국상과 부모상을 당했는데도 기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탄핵받아 파직되거나 곤장을 맞거나, 상투가 잘린 관리도 있었다. 예를들면 조선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조영무 아들 조윤이다. 태종은 조윤에게 "부친을 배반하고서 어찌 아비의 음덕을 입겠느냐"며 곤장 1백 대를 때렸다고 한다.
상투 잘린 관리는 세종 때 이조정랑을 지낸 이영서이다. 기녀와 간통을 하다가 발각되어 가족들에게 상투가 잘리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영서는 생원 시절 성균관에서 일하는 종의 처를 범했다가 상투가 잘렸다. 이 때 병조정랑 이현로는 이영서에게 "자네 머리털은 꼭 베면 다시 나는 부추나물일세그려"라고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조윤은 곤장 백 대를 맞았고, 이영서는 상투가 잘렸지만 여성이 간통을 했다면 사형이었다. 물론 세종 때 '감동' 같은 자유부인도 있었지만 이는 조선 초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조선의 성풍속>는 19세기에 접어들면 성희(性戱) 묘사를 직설적으로 담은 춘화집이 유행한 사실도 실었다. 춘화는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김홍도와 신윤복이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들이 춘화를 그린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성'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당대 최고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는 춘화들은 사실성과 예술적 격조를 갖춘 작품들이다. 따라서 이런 유의 그림들이 빠지기 쉬운 음란 외설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높은 희화성을 지니고 있다."(245쪽)조선시대에는 동성애도 있었다. 동성애는 구중궁궐에서 한 평생 한 남자(왕)만을 바라보았던 궁녀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있었다. 세종대왕은 며느리를 두 번이나 폐출시켰는데 두 번째 며느리이였던 세자빈 봉씨는 궁궐 여종 소쌍이란 여자와 동성애 때문에 폐출되었다.
이렇듯 조선시대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종속된 성풍속과 성문화였음을 <조선의 성풍속>는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