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권우성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정한 지 10년도 안 된 로마자 표기법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언어학자 등 관련 학자들의 주장이 아닌 국가경쟁력강화라는 명목으로 다시 우리의 언어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국가경쟁력강화. 듣기에 멋있는 이름이다.
그것을 집중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주인공의 말을 직접적으로 들어보지는 못했으나, 언론에 발표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현재 표기법이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 방법이 십여 가지나 되고, Gimpo를 '짐포'로 읽는 등 영어 사용자들의 혼동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말 한국에서 수백 명의 외국인을 만났지만, 김포공항의 이름을 '짐포공항'이라고 읽는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광적으로 미국식 영어에 집착하는 이가 아니라면 Gimpo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 읽기에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로마자표기법이라고 인식만 해도 문제는 사라진다.
Busan을 '부샌'으로만 읽는 미국인이 있다면 그에게 폴란드의 브로츠와프(Wrocław)나 비드고시치(Bydgoszcz) 라는 도시 이름은 차라리 그리스어에 가까울 것이다.
국가경쟁력 어쩌고 하는 그분이 생각하는 혼동과 복잡함의 원인은 그 규정 자체가 아니라 쓰는 방법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올바른 사용을 보장할 방법을 마련할 수가 없다. 각 지방에서 발간되는 자료를 보더라도 그 지역의 이름을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로마자를 단순히 국어를 표기하는 수단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뛰어넘어 정형화 된, 일명 '스펠링'이라는 차원의 가치를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자 표기법은 '대중의 약속'이 되어야한다.
우리 마음대로 워싱턴을 Woshingteon으로 적을 수 없는 것처럼 경주는 세계 어디에서나 Gyeongju, 전주는 Junju나 Cheonju가 아닌 Jeonju 라는 통일된 표기를 보장해야 정보를 검색하거나 이용하기가 편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바꿔봐야 외국인들은 인식조차 못한다 무엇보다 한국어 홍보가 더 시급하다. 외국에서 한국어 교육과 홍보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 아무리 정치인들과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해서 수십 번의 개정을 거쳐봐야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김포를 짐포로 읽는 미국인에게는 편의를 제공할까 모르지만.
199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어 맞춤법의 새로운 규정이 합의됐고, 그에 따라 독일어 교육을 실시하는 거의 모든 국가에 그 사실이 통보됐다. 그 독일어 맞춤법 개정에 대한 소식은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보도되었을 정도였고, 유럽 전체로도 큰 화두가 되었다.
한국문화에 대한 책을 유럽 현지에서 출판할 때 겪는 어려운 점 중 하나가 바로 그 표기법이다.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경우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법은 있어도 한국어 표기법이 마련되어있는 것은, 한국 내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전무하다.
그래서 한국 관련 책자를 편찬할 때마다, 현지 출판사는 어이없게도 일본어와 중국어 표기법을 들고 나오는 때가 많다. 대부분 1990년대 자료가 대부분인 동유럽의 경우 지명과 인명은 대부분 그 이전 표기법으로 적혀있고, 2000년 이후 새로운 표기법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어, 심지어 일본어 등 국제화된 언어의 표기법은 관련 규정이 생길 때마다 현지에서는 바로 바로 홍보가 진행되며 표기법을 일정하게 적용시키기 때문에 혼동이 생길 여지는 훨씬 줄어든다.
물론 각국의 언어사정에 맞추어야 하므로 우리가 제정한 로마자 표기법을 현지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한국어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곳에서도 통일된 규정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된다.
대체 그런 홍보 활동은 누가 한단 말인가. 듣자하니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하면 무려 3000억 원이라는 돈이 든다고 하는데, 차라리 그 돈을 한국어 교육과 홍보에 투자하면 안될까.
영어가 전 세계 언어 발음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현재 사용되는 로마자 표기 규정에서 여러 가지 허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국에서 접하는 로마자 표기법의 중요한 문제는, 알파벳과 구조가 상이한 한글로 적힌 우리 단어를 외국어로 올바르고 적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글말인 한글의 과학적인 우수성에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정작 입말인 한국어 자체의 아름다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로마자 표기 규정은, 한글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접하는 유일한 창구이며, 사용자마다 중구난방인 표기는 그들이 한국어에 접근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는 로마자 병기법으로 적힌 중국어 단어를 접하는 유럽인들은 X이나 Q가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읽히지 않는다고 아무도 불평불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이므로 체계적인 홍보만 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권 사람이 한국어를 어떻게 읽을까 하는 것이 그렇게 걱정이 되는가? 그게 과연 한국어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일인지, 영어의 한국토착화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그 누구는 정말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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