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의 국가경쟁력은 '김포' 아닌 '짐포'

로마자표기법 개정안에 대한 반박... 우리끼리 머리 맞대봤자 소용없다

등록 2009.06.25 11:13수정 2009.06.2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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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어 수업을 새로이 시작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바로 한국도 중국처럼 '표의문자'를 사용하냐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전체를 중국 문화권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 유럽 학생들의 고질적인 고정관념에 처음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수년 동안 경험을 해오면서 웬만큼 그에 대처할 방법도 생겨서 이제 별다른 문제점을 느끼지는 못 한다. 아무리 커다란 문제도 자주 반복하다 보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수업 첫 시간마다 늘 해오고 있는 것이 중국 글자인 한자와 우리 한글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학생들은 정작 표의문자라는 단어는 잘 알고 있지만, 그게 중국에서 사용되는 외계어 같은 글자라고만 인식을 하지 그 중요한 의미는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학생들에게 표의문자의 개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좋은 예는, 공교롭게도 바로 영어 단어다.


영어 알파벳은 표의문자다?

칠판에 sun을 적어놓고 이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 '순'이라고 발음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영어단어라는 단서를 붙여주면 다들 그 발음이 '선'이라고 말을 한다. 그것이 '순'이 아닌 '선'이 되는 근거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다 그 의미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어의 특성 중 하나는 의미를 모르면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단어가 많다는 것이다. Wednesday, daughter처럼 뜻을 모르고는 정확하게 알아먹을 수 없는 차원에서 영어 단어는 한자와 상통하는 점이 아주 많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영어 알파벳은 한글처럼 소리를 적는 글자가 아닌, 뜻을 구분해주는 기능을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영어 표기법은 영어가 공식어가 아닌 다른 국가의 언어를 올바르게 표기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 절대 아니다. 영어식 표기를 로마자 표기법으로 지정하는 것은, 차라리 중국어로 우리말 발음을 표기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어를 모든 학문의 중심으로 알고 있는 한국에서 그 영어 발음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이미 남한에만 몇 차례에 걸쳐 로마자 표기법이 제정돼 왔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마자 표기법은 바로 '미국인들이 가장 읽기 쉬운 방법'을 찾아서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이미 정부에서 지정해 놓은 로마자 표기법을 제대로 지키는 경우는, 국가홍보용으로 나온 책자를 빼고는 거의 볼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선' 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sun'을 사용하고 숙이나 순처럼 '수' 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soo'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 미국인들이 그 sun과 soo가 영어의 '태양'을 의미하는 단어와 soon이라는 단어와 연결을 짓게 되면, 한국인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선과 수로 읽어줄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의미와 연관성을 금방 찾지 못하거나, 아니면 미영어권 국민이 아닌 유럽인, 혹은 다른 문화권의 경우 예상하는 발음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란 아주 힘들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해외에서 가장 정확하게 발음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느라 고생이 많다. 그래서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도 정말 중구난방이다.

심지어 '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영자성으로 Poo, '석'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진 이가 Suck을 사용하는 어이없는 경우도 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이름을 원하는 대로 제대로 읽어줄 수는 있겠으나, 이름을 접하는 미국인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한국인들은 아무렇게나 영자 성명을 고를 자유가 있다?

할리우드에서 이미 오랜 시간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배우 오순택씨는 영화마다 Soon-Teck Oh, Soon-Tek Oh, Soon-Taik Oh 등 다양한 표기법이 사용된다.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였던 백지훈 선수는 자신의 성을 로마자 표기법에 맞는 Baek을 사용하지만 백남준은 Paik을 사용한다. 한국문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두 개의 성이 같은 성씨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경주 시내에서 발간되는 영어 안내책자에도 이전 방식인 Kyŏngju로 표기된 것이 여전히 나와 있다. Gyeongju라는 이름으로 정보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도리어 혼동을 줄 것이 뻔하다.

강제할 방법이 전혀 없는 현재의 로마자 표기법은 개인의 이름이나 지명을 표기하는데 무절제할 만큼 다양한 표기법을 방치시켜놓았고, 그 결과 위키피디아 등 온라인 백과사전에서도 한국 관련 정보를 다룰 때면 그와 관련된 다양한 표기법을 보여주어야 할 정도다.

작가 이문열의 이름이 로마자 표기로 수십 가지가 된다고 하는데, 이미 있는 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쓰도록 놔두는 현재의 제도가 문제인지, 아니면 그런 다양한 '버전'을 아랑곳하지 않는 개인의 문제인지 그 근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영어밖에 모르는 미국인들을 위해서 표기법을 개정할까?

a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 권우성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정한 지 10년도 안 된 로마자 표기법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언어학자 등 관련 학자들의 주장이 아닌 국가경쟁력강화라는 명목으로 다시 우리의 언어가 도마 위에 올랐다. 국가경쟁력강화. 듣기에 멋있는 이름이다.

그것을 집중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주인공의 말을 직접적으로 들어보지는 못했으나, 언론에 발표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현재 표기법이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해서 한 사람의 이름을 적는 방법이 십여 가지나 되고, Gimpo를 '짐포'로 읽는 등 영어 사용자들의 혼동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정말 한국에서 수백 명의 외국인을 만났지만, 김포공항의 이름을 '짐포공항'이라고 읽는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광적으로 미국식 영어에 집착하는 이가 아니라면 Gimpo가 '영어'가 아닌 한국어 읽기에 도움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로마자표기법이라고 인식만 해도 문제는 사라진다.

Busan을 '부샌'으로만 읽는 미국인이 있다면 그에게 폴란드의 브로츠와프(Wrocław)나 비드고시치(Bydgoszcz) 라는 도시 이름은 차라리 그리스어에 가까울 것이다.

국가경쟁력 어쩌고 하는 그분이 생각하는 혼동과 복잡함의 원인은 그 규정 자체가 아니라 쓰는 방법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약간의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올바른 사용을 보장할 방법을 마련할 수가 없다. 각 지방에서 발간되는 자료를 보더라도 그 지역의 이름을 공식 로마자 표기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로마자를 단순히 국어를 표기하는 수단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뛰어넘어 정형화 된, 일명 '스펠링'이라는 차원의 가치를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자 표기법은 '대중의 약속'이 되어야한다.

우리 마음대로 워싱턴을 Woshingteon으로 적을 수 없는 것처럼 경주는 세계 어디에서나 Gyeongju, 전주는 Junju나 Cheonju가 아닌 Jeonju 라는 통일된 표기를 보장해야 정보를 검색하거나 이용하기가 편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바꿔봐야 외국인들은 인식조차 못한다

무엇보다 한국어 홍보가 더 시급하다. 외국에서 한국어 교육과 홍보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한국에서 아무리 정치인들과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해서 수십 번의 개정을 거쳐봐야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김포를 짐포로 읽는 미국인에게는 편의를 제공할까 모르지만.

199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어 맞춤법의 새로운 규정이 합의됐고, 그에 따라 독일어 교육을 실시하는 거의 모든 국가에 그 사실이 통보됐다. 그 독일어 맞춤법 개정에 대한 소식은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보도되었을 정도였고, 유럽 전체로도 큰 화두가 되었다.

한국문화에 대한 책을 유럽 현지에서 출판할 때 겪는 어려운 점 중 하나가 바로 그 표기법이다.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경우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법은 있어도 한국어 표기법이 마련되어있는 것은, 한국 내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전무하다.

그래서 한국 관련 책자를 편찬할 때마다, 현지 출판사는 어이없게도 일본어와 중국어 표기법을 들고 나오는 때가 많다. 대부분 1990년대 자료가 대부분인 동유럽의 경우 지명과 인명은 대부분 그 이전 표기법으로 적혀있고, 2000년 이후 새로운 표기법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어, 심지어 일본어 등 국제화된 언어의 표기법은 관련 규정이 생길 때마다 현지에서는 바로 바로 홍보가 진행되며 표기법을 일정하게 적용시키기 때문에 혼동이 생길 여지는 훨씬 줄어든다.

물론 각국의 언어사정에 맞추어야 하므로 우리가 제정한 로마자 표기법을 현지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한국어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곳에서도 통일된 규정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된다.

대체 그런 홍보 활동은 누가 한단 말인가. 듣자하니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하면 무려 3000억 원이라는 돈이 든다고 하는데, 차라리 그 돈을 한국어 교육과 홍보에 투자하면 안될까.

영어가 전 세계 언어 발음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현재 사용되는 로마자 표기 규정에서 여러 가지 허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외국에서 접하는 로마자 표기법의 중요한 문제는, 알파벳과 구조가 상이한 한글로 적힌 우리 단어를 외국어로 올바르고 적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글말인 한글의 과학적인 우수성에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정작 입말인 한국어 자체의 아름다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로마자 표기 규정은, 한글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접하는 유일한 창구이며, 사용자마다 중구난방인 표기는 그들이 한국어에 접근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는 로마자 병기법으로 적힌 중국어 단어를 접하는 유럽인들은 X이나 Q가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읽히지 않는다고 아무도 불평불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이므로 체계적인 홍보만 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권 사람이 한국어를 어떻게 읽을까 하는 것이 그렇게 걱정이 되는가? 그게 과연 한국어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일인지, 영어의 한국토착화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그 누구는 정말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
#강만수 #로마자표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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