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고 빽빽한 독서로부터의 조그만 여유

[독서후기]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등록 2009.07.03 09:56수정 2009.07.03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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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취미가 독서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독서가 취미가 될 수 있을까? 독서라는 것이 취미의 하나, 여가활동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낯설었다. 독서는 진리에 대한 탐구이자, 책 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사람들의 '일'이라는 인식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책을 즐긴다기보다는 책을 공부하는 입장이었고, 책을 즐기는 다독가보다는 수많은 책이 꽂혀있는 다독가의 서재에 더 많은 관심을, 아니 열등감을 느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이 많은 지식을 얻는 것과 같다고 여겼고, 그래서 더 많은 책을 공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책은 관심분야의 책만으로 그 범위를 축소시킨다고 해도 무수히 많고, 또 이 시간에도 그보다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책을 읽는 속도는 일정하지만 읽어야 할 새로운 책은 더 많이, 더 빨리 등장하는 셈이다. 이처럼 무겁고 빽빽한 독서가 언젠가는 독서하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독서의 행위 자체를 가볍고 성기게 할 순 없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를 그만둔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내용이 이런 무겁고 빽빽한 독서를 근본적으로 가볍게, 성기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그만 여유를 느끼게 해주고 자신의 독서에 대해 한 발짝 뒤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책을 읽는 행위인 독서와 책을 읽지 않는 행위인 비독서의 경계가 매우 모호함을 지적한다. 대체 어떤 행동이 책을 읽은 것이고, 어떤 것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인지 묻는다.

 

책을 오랫동안 접했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간단한 질문임에도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독서라는 행위를 지속하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웠지,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서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고민이 없는 독서는 단순한 글 읽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과연 그것으로부터 나온 지식, 결과물이 제대로 된 것일까? 그 동안 책을 읽는 독서가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를 읽는 노동을 해온 것이 아닐까?

 

저자가 무겁고 빽빽한 독서를 잘못된 것, 틀린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도서관의 모든 책 목차를 훑어본 사서, 문학작품을 읽지 않고 작가와 작품을 비평하는 비평가 등을 예시로 내세우며 독서가 단순히 많은 책을 정독하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줄 뿐이다.

 

또 흔히 알고 있는 비독서의 방법, 훑어보기, 목차만 보기, 겉표지만 보기, 심지어 아예 책 자체를 보지 않기 등이 더 독서에 가까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어떠한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는 이것이다"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더 폭넓고 다양한 독서를 하자는 것이다. 책으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서의 무거움에 눌려 그것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양하고 폭넓은 독서가 필요한 이유는 책이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도, 심지어 접할 수도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 무겁고 빽빽하기만 한 독서는 결국 이러한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저자는 해결책으로 "내면의 도서관"을 제시한다. 자신만의 독서법을 가지고 독서한 책들을 자신 내면의 도서관에 배열하는 작업으로 무수히 많은 책들에 대처할 수 있고, 그렇게 한다면 책 제목처럼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넓은 시각에서 자신이 독서한 책을 다른 책들과의 관계 속에서 배열하는 것이다.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렇지만 저자는 독서하는 행위 자체, 책 자체를 더 넓은 시각에서, 그것들이 이루는 관계망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비록 그의 책이 일정한 해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지만 이 책으로 말미암아 독서라는 행위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할 수 있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그 시작은 무겁고 빽빽한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다양한 독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독서에 있어서 조그만 여유가 된다.

 

그 동안 책 속의 텍스트를 한 자 한 자 읽어서 모두 소화해내야만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던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책 한 권만을 보는 편협한 사고가 아니라 도서관 전체의 책을 보는 넓은 사고로부터 나오는 여유. 이 조그만 여유는 무겁고 빽빽한 독서를 조금 가볍고 성기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책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여전히 무겁고 빽빽한 독서를 원하고 또 그렇게 독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먼지만 쌓여있던 내면의 도서관이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http://pen9uin.eesoul.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7.03 09:56ⓒ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http://pen9uin.eesoul.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2008


#독서 #비독서 #피에르 바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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