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청와대
다음 물음에 답해보자.
'차용증을 주고받거나 부동산 계약서를 쓸 때 날짜를 명시하지 않는다면?'
답은 '날짜가 쓰여 있지 않는 차용증이나 부동산 계약서는 법률적 효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차용이나 계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이다. 그래서 실제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대통령이 서명한 법률안에 서명일을 적지 않고 있어 "입법절차의 심각한 하자"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관보발행일이 법률 공포일이라고?... '법령 공포법'에 문제점 내재 보통 국회나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은 소관상임위 심사 등을 거쳐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다. 이렇게 의결된 법률안은 대통령에게 이송되고, 대통령은 이 법률안에 서명한다.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 이후 확정된 법률은 관보에 게재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이 법률안에 서명할 때 '관보발행일자와 중첩되는 걸 피한다'는 취지에 따라 '서명일'을 적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법령 등 공포에 관한 법률'에 따른 적법한 절차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소준섭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국제관계학 박사)은 "국가수반으로서 대통령이 국가제도의 근간인 법률의 확정을 서명하면서 그 일자조차도 명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라며 "이는 우리나라 입법절차에서 너무나 심각한 하자"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치 출생일자는 빠트린 채 출생사실을 신고한 날짜만 남아 있는 꼴"이라고 꼬집으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아무런 지적도 없었고 특히 법학계에서조차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잠시 '법령 등 공포에 관한 법률'을 살펴보자. 이 법률 제5조와 제7조에는 '법률(대통령령) 공포문의 전문에는 국회의 의결을 얻은 뜻을 기재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후 대통령인을 압날(押捺, 날인)하고 그 공포일을 명기하여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다'고 규정돼 있다.
이 조항만 본다면, 대통령은 법률안에 서명할 때 서명일('공포일')도 함께 적어야 한다. 그런데 같은 법률 제12조에는 "법령 등의 공포 또는 공고일은 그 법령 등을 게재한 관보 또는 신문이 발행된 날로 한다"고 기재돼 있다. 법률공포일은 관보발행일로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 법률 조항들을 충실히 따른다면 대통령은 관보가 발행되기도 전에 공포일(관보발행일)을 미리 적어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준섭 조사관은 "법률의 서명과 날인, 공포일의 명기는 모두 대통령의 행위"라며 "대통령이 서명한 후 대통령인을 날인하고 어떻게 아직 발생하지 않은 행위인 공포의 일자를 미리 명기할 수 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일본·대만 제외하고 공포일과 관보발행일 다르다"이러한 문제점은 '공포'라는 법률적 개념을 잘못 해석·적용한 데서 생겨났다는 것이 소준섭 조사관의 주장이다. 즉 우리나라의 경우 '공포'와 '공표'(혹은 '공시')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공포'와 '공표'는 엄연히 다른 입법행위이자 절차다.
공포(公布, Promulgation)는 '법률의 확정'이라는 뜻을 가지는 법률적 개념이고, 공표(公表) 혹은 공시(公示, Publication)는 '대중에게 법률 확정 사실을 널리 알리는 절차'다. 후자는 '법률 효력이 발생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결국 대통령의 서명 등은 법률을 확정하는 공포에 해당하고, 관보발행(게재)는 국민에게 법률 확정을 알리는 공표나 공시에 해당한다.
법률 공포 등과 관련 각국의 사례들을 수집했던 소준섭 조사관은 "현재 미국과 일본, 한국, 대만을 제외하고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연합 국가들과 러시아 등 대부분의 나라는 공포일과 관보발행일은 상이하고, 공포일은 서명일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포일과 관보발행일을 일치시키고 있는 우리나라는 특히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천황 칙령 6호 공식령' 제12조에는 "법령의 공포는 관보로써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공식령마저 지난 1946년 폐지됐지만, 일본은 여전히 관보를 통해 법률의 공포가 이루어지고 있다.
소준섭 조사관은 "입법절차의 정당성은 법률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필요조건의 하나"라며 "가장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할 대통령에 의한 입법절차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조속히 개선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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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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