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신장의 고산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투르크 계열의 카자흐족. 위구르인도 투르크 계열인 돌궐의 후손으로 유목민이었다.
모종혁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을 탄생시킨 위구르의 정착사
위구르인의 고향 신장은 수천 년 동안 유목민족과 한족이 패권을 다퉈왔던 곳이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신장에 처음 정착한 민족은 인도유럽어족 계열 유목민이었다. 이들의 흔적은 고대 누란과 호탄(和田)왕국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두 왕국 유적에서 발굴된 미이라는 큰 키, 황금 머리카락, 오똑선 코, 깊은 광대뼈 등의 신체적 특징으로 갖추고 있다. 신장의 첫 정착민은 동서문명 교류의 메신저였다. 이들은 인도와 중앙아시아, 유럽의 문명을 중국으로, 중국의 문화를 서구 세계로 전파시켰다.
머나먼 서역(西域)의 오랑캐로 치부됐던 신장의 유목민족이 중국에게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흉노의 등장부터다. 이미 기원전 8세기 주나라 때부터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흉노는 몽골고원과 신장을 비롯한 중국 서북부 대부분을 지배했다.
기원전 4세기부터 흉노는 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을 빈번히 공격했다. 강성한 흉노 기마군대의 위력에 못 견딘 제후국들은 방어책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이것이 뒷날 만리장성의 시초가 됐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장건을 파견하여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화친을 맺으려 했다. 원하는 성과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장건이 가져온 서역의 정보는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가 열리는 계기가 됐다.
흉노는 1세기부터 내부 분열과 중국 왕조의 잇단 공격으로 세력이 약해져갔다. 5세기 이후 흉노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6세기 중앙아시아와 몽골고원을 지배한 투르크 계열의 돌궐은 흉노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실제로 흉노의 문화와 풍습은 투르크민족과 일치한 것이 많다.
7세기 들어 부족 내 항쟁과 중국의 이간책으로 돌궐제국이 붕괴되자, 돌궐의 한 부족이었던 위구르인들은 신장에 뿌리를 내렸다. 744년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이 위구르제국을 건국하여 신장 전역을 장악했다. 위구르제국은 중국과 대응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는 대군을 파견해 평정했다.
840년 키르기즈민족에 의해 위구르제국이 멸망하자, 위구르인들은 신장 각 지역에 크고 작은 왕국을 세웠다. 13세기 와서는 새로운 격변을 맞이했다.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에 흡수되면서 신장 전역에서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위구르인이 이슬람교를 믿게 것은 신장을 지배했던 차카타이 칸국 왕실이 이슬람에 귀의하고 널리 선교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까지 몽골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신장은 다시 청나라로 패권이 뒤바뀌었다. 18세기 러시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청나라는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장성을 설치했다. 20세기 들어 청조가 멸망한 뒤 신장은 지역군벌의 통치를 거쳐, 공산당정권의 점령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