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른의 이름을 기억하며

등록 2009.08.30 09:34수정 2009.08.3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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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른의 이름은, 다른 여러가지 것들과 함께 기억된다.

고향이 경상북도 포항인 나. 97년, 중학교 도덕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정계은퇴를 한다고 했는데도 다시 대통령 되려고 나온 사람. 그렇게 거짓말하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면 안된다고.
도덕선생님 말씀 속에, 이 어른은 거짓말쟁이. 그때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었다.

99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전라남도 광양으로 전학을 갔다. 전학가기 전, 어머니는 한숨을 푹푹 쉬셨다.
이제 너한테 전라도 고등학교 딱지가 찍힐텐데 어떡하냐.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하게 감을 잡기 시작했다. 딱지... 딱지라고?

어른들의 눈 속에는, 전학을 간 후의 나는 참 '전라도스럽게' 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에서 <한겨레21>과 <시사저널>을 처음 접했다. 이야, 재밌네? 잡지는 대출이 안 돼서, 점심을 거르며 읽었다.
국사선생님은 5.18 다큐를 수업시간에 틀어주셨다. <한겨레>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셨다.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얘기들.
그러다가 이 어른의 이름을 아주 구체적으로 다시 접한 건, '인물과 사상'이라는 잡지를 읽으면서였다.
강준만은 투박하게, 고종석은 세련되게 '전라도 얘기, 김대중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고종석은 전라도를 유태인에 비유했고, '낙인'의 최고정점에 이 어른이 있다고 말했다.

낙인... 딱지... 그랬다. 그들의 글을 읽으며 비로소 나는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에 이글거리는 증오를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 전라도 고등학교 딱지가 찍힐까봐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한숨처럼.
서울로 올라가고 난 후에도, 고향을 밝히면 또래에게 '너가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말을 몇 번 들었다.
아아. 증오는 어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되물림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숨을 참고 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증오.

그러나 난 또한 또렷히 기억한다. 이 장면을.




2000년 남북정상회담. 내가 고3때였다. 입시에 바쁜 와중에서도 학교에서는 TV시청을 허용해줬다.
점심을 먹으러 학교식당에 가기 싫었다. 계속 계속 교실 책상에 앉아, 비춰지는, 저 화해의 단초를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 물이 고였다. 감격스러웠다. 우리가 이제... 서로 웃는구나. 손을 잡았구나.
증오가 서서히 벗겨지는구나. 우리의 선함을 이 어른이 이끌어냈구나.

내 세대와 별로 친근하지 않은 이 어른. 지지한다기보다, 반대한다기보다... 대단하다 여긴 이 어른.


그 대단한 어른이 가셨다. 영걸식이 치러진 날 자정, 집으로 향하다- 아무래도 들러야 할 것 같아
혼자 찾은 서울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머뭇. 곧 막차가 끊길텐데... 돌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수많은 역경을 뚫고도 희망과 사랑을 말한 당신의 그 기다림에 비하면, 이까짓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1시간 반을 기다리며 조문을 하고 나왔을 때 받은, 이 어른의 일기장. 1월 26일의 일기.



이 어른의 많은 실정들을 알고있다.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다만,
끝까지 낮은 곳을 보려 한 이 어른의... 진정어린 감성을 존경한다.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증오 속에서, 끝까지 화해를 말하려 숨을 참았던 이 어른의 의지를.

대단한 어른. 안녕히 가셔요.
나도 언젠가 당신처럼 강해지기를 바라요.

덧붙이는 글 | 다음 뷰에도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 뷰에도 송고했습니다.
#김대중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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