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화를 내고 그래!"

이 놈의 화 기운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등록 2009.09.01 16:58수정 2009.09.0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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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방 천장에 빗물이 스며 들어와 넓다란 함지박을 받쳐 놓았지만 장대비가 내리면 그마저 소용이 없다.

안방 천장에 빗물이 스며 들어와 넓다란 함지박을 받쳐 놓았지만 장대비가 내리면 그마저 소용이 없다. ⓒ 송성영


여름의 끝자락, 태풍이 비바람을 몰고 오던 날이었습니다. 장대비가 억수 같이 쏟아 붓고 거센 바람이 낡은 지붕 끝자락을 흔들어 댔습니다. 사랑방 옆 개울물은 밤새 큰 소리를 내지르며 마을 아래로 몰려갔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식구는 안방에서 윗방으로 피난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면 낡은 지붕 틈새를 타고 빗물이 새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빗물이 새어 들어오는 곳에 맞춰 넓다란 함지박을 받쳐 놓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어나 보니 밤새 스며든 빗물로 안방이 온통 물바다로 변해 있었습니다. 흥부네 집이 따로 없습니다. 이사를 가야 할 처지에 놓여 다 낡은 지붕을 대강 대강 손 보고 방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그쳤던 빗줄기가 또다시 사정없이 쏟아 부었습니다. 흥건한 걸레를 쥐어 짜 내 가며 빗물 가득한 안방을 훔쳐 내고 있는데 갑자기 집 앞에서 "뚜두둑"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몸통만큼이나 굵은 오동나무 가지가 부러져 내리는 소리였습니다. 한쪽 팔을 잃은 커다란 오동나무의 몸체는 허연 속살을 들어내 놓고 있었고 부러진 나뭇가지는 집 앞길을 막고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a  요란한 천둥 번개와 함께 집 앞 개울가 오동나무의 가지가 우두뚝 부저려 내렸다.

요란한 천둥 번개와 함께 집 앞 개울가 오동나무의 가지가 우두뚝 부저려 내렸다. ⓒ 송성영


본래 천성이 느려터진 나는 나뭇가지가 길목을 막거나 말거나 컴퓨터 앞에서 밥벌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재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효 아빠! 저거 좀 치워야 겠어."
"잠깐만 기다려 이거 대충 정리해 놓고 갈게."
"나무부터 치워 놓고 하지."
"한 이삼십 분이면 끝나니께, 쪼금만 기다려."

아내의 성화에 쫓기다 보니 일머리가 쉽게 정리 되질 않습니다. 성질 급한 아내는 5분도 채 안돼 다시 재촉합니다.


"인효 아빠! 같이 좀 치우자니까, 나 혼자서는 도저히 못 하겠어."
"그냥 내비 둬. 조금있다 내가 한다니께 자꾸 그러네, 지금 당장 외출할 것도 아니잖어, 아침부터 누가 찾아 올 것두 아니구."
"에이 참, 저거부터 치워 놓고 하면 안돼! 안방에 빗물은 줄줄 새고 정신없어 죽겠는데…."

아내의 화 기운이 점점 상승곡선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의 불같은 화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물처럼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특효라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지만 밥벌이 원고 작업에 예민해 있던 나는 그런 아내에게 휘발유를 끼얹고 말았습니다. 


"에이 참, 그거 이삼십 분도 못 참고 왜 자꾸만 달달 볶아대고 그려, 정신 사납게!"
"왜 화를 내고 그래! 금방 나와서 해주면 될 거 가지고."
"화는 누가 먼저 냈는디, 꼭 자기 입장만 생각 혀, 내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말여…."
"뭐가 내 입장만 생각한다고 그래!"

그렇게 대판 싸움이 붙었습니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까지 건너뛰었습니다. 싸우고 나면 한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뒤틀린 속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먼저 늘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하루가 지나도록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러 다니며 화 기운을 삭이고 있었지만 나는 꽁생원처럼 방구석에 틀어 박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텔레비전에 두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증오심을 자극하는 빤한 드라마에 빠져들었고 아침저녁으로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뉴스에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안테나를 좌우로 조절해야만 겨우 화면이 잡히는 텔레비전에 혼을 쏙 빼놓고 있다가 어쩌다 오줌을 싸기 위해 방안에서 기어 나오게 되면 모가지 비틀린 풍뎅이처럼 마당을 빙빙 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진드기로 고생하는 우리 집 개 곰순이처럼 사타구니를 득득 긁어대며 텔레비전 앞에 널부러져 평소 입에 잘 대지 않던 인스턴트식품까지 옆에 끼고 먹고 싸고 잠자고, 밥충이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드라마 속의 나쁜 놈처럼 온갖 나쁜 생각에 사로잡혀 사흘을 보내다보니 눈자위마저 거무스름해져 갔습니다. 

아이들은 강시처럼 핏기 없이 뻣뻣해진 아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곰순이 마저 꿈쩍도 않고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마당을 빙빙 돌다가 곰순이 녀석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벌떡 일어나 꼬리를 세차게 흔들어 대며 목줄을 풀어 달라 컹컹 짖어댈 녀석이었는데 꿈쩍도 않고 고자세로 누워 있습니다. 납작 엎드린 채로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흰자위를 들어내며 슬금슬금 눈알만 굴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태풍에 우지직 부러져 내린 오동나무 가지의 잎사귀들처럼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생기를 잃고 바싹 바싹 말라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a  화기운은 또다른 화기운을 불러드린다. 악업처럼 단칼에 끊어내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생명을 아프게 한다.

화기운은 또다른 화기운을 불러드린다. 악업처럼 단칼에 끊어내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생명을 아프게 한다. ⓒ 송성영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착한 사람을 해코지하기 위해 증오심에 불타 있는 텔레비전의 전원을 끄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곰순의 녀석의 목줄을 풀어 고무신을 질질 끌고 밭으로 나섰습니다. 새 터전을 구하겠다며 싸돌아다니느라 방치해 놓았던 밭은 온통 풀숲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먼지 쌓여 있는 풀 깎는 기계를 짊어지고 윙윙윙 소리를 내질러가며 풀들을 왕창왕창 밀어냈습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미친 듯이 풀을 깎아댔습니다.

"왱왱왱~ 쫘르륵 좌악~"

곰순이 녀석은 기계음에 놀라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나는 풀들이 왕창왕창 깎여 나갈 때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가슴팍에 암 덩어리처럼 박혀있던 화 기운이 산산 조각 나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밭 한 옆에 놓여져 있는 둠벙가 벚나무 그늘에서 잠시 땀에 저린 몸뚱아리를 식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사지가 절단된 개구리 한 마리가 깎인 풀 틈 사이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끝이 찌릿찌릿 저려왔습니다. 화 기운을 가라앉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풀 깎는 기계를 통해 좀더 강력한 화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함부로 휘두른 그 화 기운에 개구리의 사지가 절단 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생명들은 오죽했겠습니까? 화기운은 또다른 화기운을 불러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업처럼 단칼에 끊어내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생명을 아프게 합니다. 파괴합니다.

죄인처럼 망연하게 주저앉아 비 온 뒤끝의 맑디맑은 둠벙 속에 내 모습을 가라앉혀 봅니다. 덥수룩한 수염에 봉두난발한 머리채, 화 기운에 일그러진 초상, 나는 본래의 나로부터 아주 멀리 달아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개구리는 물론이고 밭을 기름지게 일궈 주는 지렁이며 미생물조차 놀래고 다칠까 싶어 풀 깎는 기계 따위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나였습니다. 두 손으로 풀을 뽑아 밭작물 옆에 가만가만 눕혀 흙으로 되돌려 주고자 했습니다. 적당히 풀을 뽑고 적당히 풀을 남겨 밭작물과 공존하길 기원했습니다. 풀밭은 마음자리를 다스리는 수행처나 다름없었습니다. 풀을 뽑아 밭작물을 키우고 그 밭작물을 통해 얻은 기운을 좋게 되돌려 놓고자 했습니다.   

밭작물을 가꾸며 흙으로부터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흙으로 되돌아간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연명해주고 있는 온갖 생명들에게 감사해 가며 고운 흙을 어루만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인적 뜸한 밭은 나만의 사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그 신성한 사원을 까뭉개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파괴적인 마음자리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생각해 보면 흙에서, 땅에서부터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내게 흙은, 땅은 생명이었습니다. 온갖 생명을 키워내는 그 자체로 생명덩어리였습니다. 지상에 땅 한 평 가진 것 없이 남의 땅 빌려 밭작물을 키워 오면서 생활해 왔지만 땅 가진 사람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남고속 철도에 쫓겨나야할 위기에 놓여지자 새 터전을 구하겠노라 땅값이 싸니 비싸니 투덜거리며 땅을, 생명을 저울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발지상주의를 미워하고 있었으면서 개발지상주의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새 터를 마련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변명을 앞세워 생명덩어리를 자본의 가치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들이 뒤틀려지기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단순한 입씨름에서 조차 쉽게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좀더 먹고 좀더 편히 잠잘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겠노라 값싼 땅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자본에 가치를 두고 생명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여전히 보고 있냐구요? 어쩌다 싱겁기 짝이 없는 반전이 있을 뿐, 다음 장면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대충 짐작 할 수 있는 드라마. 갈등과 화해가 반복되는 빤한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가 쉽지 않더군요. 싸우다가 화해하고 다시 또 싸우는, 사는 게 다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그 빤한 드라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거립니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산송장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 <풍경소리> 9월호에 실린 원고를 수정해서 올린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풍경소리> 9월호에 실린 원고를 수정해서 올린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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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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