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9.04 21:06수정 2009.09.0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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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주무셔서 편지 써 놓고 가요 어머니. 저 지금 논에 물 보러 가거든요.
장마 끝나고 봇도랑에 물이 마르니까 사람들 인심이 사납네요. 어제 봤더니 수통에 놓인 우리 물 호스를 누가 둑으로 걷어 올려버렸어요. 밑에 논에서 그란 모양인데 물을 훑어가더라도 어째 남의 물 호스를 걷어내 버리는지 집으로 쫒아가서 한 마디 하려다가 참았어요.
논은 쩍쩍 갈라져 있는데 물 호스 걷어 낸 거 보니까 첨에는 눈에 불이 확 일더라고요. 여든이 다 된 수빈이 할머니 아니면 다리 저시는 박씨네서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참았어요.
그놈의 경지정리라는 걸 해 놓고 보니 다 좋은데 불편한 게 하나 있어요. 물꼬가 하나밖에 없어서 논 한 번 마르면 물 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네요. 일곱 마지기 논이 한 다랑이로 되어있어서 저쪽 끝에까지 물이 내려가려면 하루 종일 걸려요.
옛날에 어머니가 농사지을 때는 전부 열 다랑이가 넘었죠? 제일 윗 다랑이 논 뒤에는 빗물을 모았다가 가물 때 사용하던 조그만 연못이 있던 거 알죠?
그것도 포클레인으로 다 메워 가지고 지금은 논으로 만들었어요. 물 안 고이게 돌이나 자갈을 쳐 넣어 메우고 그 위로 흙을 5톤 트럭으로 일곱 대인가 쏟아 부었는데도 찬물이 자꾸 고여서 그쪽 나락은 잘 안 커요.
서울 큰 형님 댁에 계시다 나이 잡수시고 불구의 몸이 되어 시골로 오셨으니 그 사이에 농토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실거 같아서 얘기했어요.
어머니 오늘 좀 늦게 올지 몰라요.
밥 차려 윗목에 뒀으니까 제가 늦으면 어머니가 혼자라도 먼저 드세요. 아무래도 오늘은 냇가 큰 보까지 가 봐야겠어요. 도랑에 졸졸 내려오는 물을 전부다 우리 논으로 막아 넣어버리니까 아래 논 사람들이 좀 성이 난 거 같아요. 냇가 큰 보 물을 걷어 들여야지 도랑으로 내려오는 그 물만 막아 댄다고 말예요.
참. 논둑 가까이로 보니까 나락 대궁이 도르르 말리면서 허옇게 말라 죽는 게 여러 개 있더라고요. 뽑아 봤더니 끝이 썩어 있어요. 이화명나방 애벌레가 잘라먹는 거라는데 돌아오면서 한두 개 뽑아 와 볼게요. 어머니가 봐야 정확하니까 한번 봐 주세요. 은나노 이온수도 뿌렸고 목초액이랑 현미식초도 여러 번 뿌렸는데 벌레가 생겨서 걱정이에요. 이제 두 달만 있으면 햅쌀이 나는데 도열병하고 멸구만 막으면 될 거 같아요.
저를 빨리 불러야 되면 벽에 있는 큰 스위치 누르세요. 그게 제 전화로 신호가 오게 되어 있어요. 물은 뚜껑 덮어서 장롱 밑에 있어요.
얼른 갔다 올게요.
막내 희식이가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cafe.naver.com/mobo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9.04 21:06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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