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고추가 널린 우리 마당에도 가을이

농사꾼은 항상 내년 내년하며 가을을 맞는다

등록 2009.09.08 09:50수정 2009.09.0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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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가을

a  우리 밭에서 거둔 고추를 깨끗이 씻어 꼭지를 따 마당에 말렸다. 아내는 우리 집에도 가을이 찾아든 것 같다며 기뻐했다.

우리 밭에서 거둔 고추를 깨끗이 씻어 꼭지를 따 마당에 말렸다. 아내는 우리 집에도 가을이 찾아든 것 같다며 기뻐했다. ⓒ 전갑남


계절은 이미 가을인가? 처서가 지나고부터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더위가 한풀 꺾였다. 이른 새벽, 이불자락이 잡아당겨진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계절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고 또 간다는 사실에 엄숙해진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면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야한다는 이치를 새삼 깨닫는다.

며칠 상간에 하늘이 한결 맑아졌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잘 어울린다.

푸르름만 고집하지 않은 들판도 색깔이 달라지고 있다. 누런빛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꼿꼿이 고개를 쳐들었던 이삭들이 뜨물을 안치고선 몸을 낮췄다. 머리에 든 것이 많으면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을 보고서도 자연의 겸손함을 배운다.

기세등등하던 잡초들은 더 이상 키 크는 것을 포기한 듯싶다. 자라는 속도가 더뎌졌다. 이제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꽃이 진 자리에 씨를 맺느라 부산하지 않을까?  말없이 내년을 기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해도 많이 짧아졌다. 요즘은 6시가 지나야 동이 트는 듯싶다.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가을의 전령사들이 합창을 한다. 녀석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흉내 내기가 참 어렵다. "귀뚤귀뚤, 쓰르르, 찌르찌르!" 여러 소리가 뒤섞여있다. 시끄럽지가 않다. 청아한 소리가 참 듣기가 좋다.


녀석들, 오늘은 무슨 노래를 부르는 걸까? 밤새워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고도 아직 힘이 남아있다. 녀석들도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며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는지 모르겠다.

아마추어 농사와 프로 농사의 차이


결실의 앞둔 계절이다. 마당에 흥건히 이슬이 내렸다. 토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영롱하다. 밤새 내린 작은 물방울이지만 식물이 자라는 데 생명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동녘에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맑은 햇살에 풀벌레 소리도 잦아들고, 풀잎에 맺힌 이슬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부지런한 이웃집 할머니네 식구들이 고추밭에서 일을 한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오순도순 고추를 따고 있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말을 건넸다.

"할머니, 일찍부터 고추 따시네요?"
"선선할 적에 일을 해야지, 낮에는 따가워서 힘들어."
"올핸 고추가 많이 달려 신나겠어요?"
"그럼. 올해 같기만 하면 가을을 맞이할 만 하지."
"우리 고추밭은 막판에 별로인데…. 뭐가 잘못됐을까요?"
"다른 거 있남. 내 말을 안 들어서 그렇지! 때맞춰 약 치라니까 안 치구선!"

할머니 야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신께서 가르쳐주는 데로 고추밭 소독을 게을리 해서 고추농사가 자기네만 못하다는 것이다.

고추는 약 안치고선 못 먹는다며 할머니는 나를 보면 누누이 강조하였다.

"병 오기 전에 소독해야지 병들면 그 땐 이미 늦어! 중요한 것은 장마야. 장마가 오기 전에 미리 단단히 소독을 하라구. 또 장마기간에는 비 그치면 소독하고, 고추 따고난 뒤 소독하고! 이렇게 하면 병이 달려들라고 해도 못 달려들어!"

할머니는 수십 년 고추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경험에서 당부에 당부를 하셨다. 사람도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하듯 작물을 가꿀 때도 예방이 최고라는 것이다.

a  절반 가량은 죽지 않아 다행이었다. 앞으로 한두 번 더 수확할 것 같다.

절반 가량은 죽지 않아 다행이었다. 앞으로 한두 번 더 수확할 것 같다. ⓒ 전갑남


그러고 보면 고추농사는 장마가 문제였다. 우리 고추밭은 장마 전까지는 병 없이 잘 자랐다. 꽃이 하얗게 피고, 풋고추도 숱하게 달렸다. 할머니는 이때부터 건사를 잘해야 고추가 붉어지고, 병 없이 잘 자란다고 하였다.

할머니네는 열흘 남짓 간격으로 살충제와 살균제를 적당히 섞어서 뿌렸다. 철저히 예방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할머니 훈수를 그냥 흘려보냈다. 멀쩡하게 잘 자라는 고추밭에 소독하기는 께름칙하였다. 어쩌면 소독을 안 하고도 잘 자랄 것 같은 기대를 가졌는지도 모른다.

a  장마가 끝난 뒤 시들시들 말라 죽기 시작한 고추밭. 그래도 밭 전체로 번지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장마가 끝난 뒤 시들시들 말라 죽기 시작한 고추밭. 그래도 밭 전체로 번지지 않은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 전갑남


그런데 웬걸! 장맛비가 그치고 날이 푹푹 찌던 날, 고춧대 몇 주가 시들시들 마르기 시작했다. 물기가 축축한 땅에 고춧대가 마르다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날이 지날수록 죽어가는 숫자가 늘어났다. 미리 소독을 한 이웃집은 싱싱하게 잘만 자라는 데, 우리 것은 말라죽었다.

그 때서야 나는 농약가게를 찾았다. 고추밭에 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예방이 중요하다는 할머니의 교훈이 새삼 생각났다.

나는 부랴부랴 살균제, 목초액에 칼슘제까지 섞어 뿌렸다. 그런데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고추밭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시들시들 말라죽는 고춧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여러 해 농사를 지어온 프로 농부와 아직 일에 익숙지 않은 아마추어 농사꾼과는 차이가 많이 났다.

농사꾼은 내년 내년하며 농사를 짓는다

아침을 먹으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a  고춧대에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고춧대에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 전갑남


"여보, 쉬는 날이니까 우리도 고추 따야지?"
"당신은 고추밭 쳐다보기도 싫지 않아요."
"그래도 살아남은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
"옆집은 우리보다 두 배는 더 따는 것 같던데…."
"이사람, 욕심은! 프로와 아마추어가 같은가!"

농사일을 할 때도 힘들 때가 있고, 신이 날 때가 있다. 농사가 잘 되면 수확의 기쁨이 있어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런데 올 우리 고추밭처럼 자라는 게 시원찮으면 일을 해도 신이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내는 소중히 여기고 열심이다. 아마 그간 공을 들이고, 땀 흘린 것을 생각한 모양이다.

"여보, 오늘 딴 것만 해도 한 가마는 훨씬 넘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많이 거뒀네!"

a  아내와 함께 수확한 고추이다.

아내와 함께 수확한 고추이다. ⓒ 전갑남


많이 망가지기는 했어도 거둬들인 고추가 꽤 된다. 우리는 힘들게 딴 고추를 깨끗이 씻었다. 물기가 마르자 이번에는 꼭지를 따냈다.

일을 다 마친 아내가 말을 걸어온다.

"당신, 내년에도 고추 많이 심을 거예요?"
"그럼, 심고말고!"
"올해처럼 병들어도?"
"올 경험 했으니 내년엔 잘 해봐야지! 농사꾼은 내년 내년 하며 농사짓는 거잖아!"

아내는 내년엔 얼마나 고추농사를 잘 짓나 두고 보자고 한다. 그래도 내년을 기약하자는 말에는 힘이 실린다.

빨간 고추가 널린 우리 마당에도 가을이 찾아온 것 같다.
#고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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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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