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복을 타고났다고 방에서 자"

등록 2009.10.16 10:16수정 2010.01.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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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다음 날 막내아우가 다녀간 뒤로 어머니의 언행에 굉장한 변화가 생겼다. 코에서 흐르는 콧물을 막는다고 화장지나 방바닥을 뜯어내는 오래된 습관이 일시에 뚝 사라졌다. 목욕을 하자 해도 예전처럼 숨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일 년여 만에 본 막내아들에게서 어머니는 무엇을 발견하신 것인가?


대학 이 학년 때 수업료 걱정 그만하겠다고 하사관 지원해서 직업군인으로 나서버린 막내아우의 등장은 사실 내게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근무지가 전방 근처인 까닭에 외출을 나와도 전라도까지 내려오는 일은 별로 없었고, 명절이라 해서 녀석이 내려올 것이라 기대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어쩐 일인지 온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그래서 왔는데, 혼자가 아니고 어여쁜 아가씨를 동반했다. 꿀처럼 달디단 반건시 곶감을 한 아름이나 들고 내려온 녀석은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라는 듯이, 거두절미하고 금년 가을이 끝나기 전에 결혼을 하겠단다. 그리고는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돌아갔다.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나위 없었지만, 무슨 선전포고도 아니고 최고통지도 아니고 이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 같은 것이 뒤섞여서 기쁨을 온전히 기쁨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아주 수상한 심사가 되어버린 나는 미래의 제수씨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채로 헤어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막내의 이름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십대 중반에 갑자기 생긴 막내를 낳아놓고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친척들로부터 미쳤다는 둥, 무슨놈의 깨가 그렇게도 주책없이 쏟아지느냐는 둥 놀림도 무던히 받았었다. 그만큼 연민도 깊었고, 막내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앞이 침침해져서 먼 하늘을 한참씩이나 우러러보곤 했었다. 그런 막내가 오랜만에 왔는데도 어머니는 이제 그 무슨 초월이라도 해버린 듯 이따금 벙글벙글 웃고나 있었다. 결혼이라는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곶감이 "겁나게 달다"는 둥, 당신이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일본말 공부가 싫어서 산으로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종아리를 맞았는데 지금도 아프다는 둥 동문서답으로 일관하는 어머니,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막내가 데려온 어여쁜 아가씨를 빤히 쳐다보며 "젤로 어른이여", 한 마디 하고는 다시 큰아들인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집에서는 장남이 제일 어른이라는 뜻으로 읽히는 어머니의 그 말씀은 한두 번도 아니고 막내가 돌아가는 시간까지 거의 십여 분 간격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슬쩍 흘리는 방식으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고도의 지능적인 화술을 연상케 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순간순간 긴장된 눈빛으로 어머니를 탐색하면서도 설마 그럴 리야, 하는 마음으로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모두들 웃고는 있었지만 웃음이 웃음일 수만은 없는 약간의 당혹스러움 속에서 막내는 귀대 시간을 이유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상이랄 것도 없는 밥상을 차려놓고 여느 때와 똑같이 "밥 먹읍시다" 하는데 어머니가 돌연 "예, 알았어요" 하신다. 전에는 밥 먹자고 하면 "응" 하시던 어머니가 왜 이러시나, 마음이 넉넉해져서 농담이라도 좀 하자는 건가, 해서 다시 한 번 "밥 먹자고요" 해 보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공손하게 마치 말 잘 듣는 소녀처럼 길게 빼서 "예에, 알았어요오" 그러신다.


"아니 엄마, 나 몰라요? 내가 누구여?"
"아따 오빠도 참, 내가 무신, 시상에나 오빠는 나를 무신 노망든 할마씬 줄 아시네비요 잉?"
"오빠? 내가?"
"아이 연춘이 오빠아, 어째 자꾸 그러신다요. 그새 노망드셨어요?"

어머니는 진지하게, 순정하다 싶으리만치 진지하게 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외삼촌의 함자가 연춘인 것은 맞다. 유연춘.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들이 오빠로 변해 버렸는가. 도대체 어머니의 머릿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그날 이후 사흘 동안 나는 계속 어머니의 오빠로 살아야 했다. "세수합시다" 하면 "알았어요. 내 낯바닥 내가 할게요" 하시고, "오줌 안 마려워요?" 하면 "아따 오빠도 참, 챙피스럽게…" 하신다.

 민들레를 쑥이라고 속인 아들의 고충(?)을 어머니는 어쩌면 알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민들레를 쑥이라고 속인 아들의 고충(?)을 어머니는 어쩌면 알고 계시는지도 모른다.김수복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어머니는 갑자기 쑥을 캐러 간다고 바구니를 달라고 하신다. 이 가을에 무슨 쑥을 캔다는 것이냐고 바보 같이 중얼거리는 내게 어머니는 칼도 달라고 하신다. 칼 소리에 나는 은근 긴장이 되어 어머니를 보는데, 어머니는 진지하면서도 이상하게 즐거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구니와 칼을 재촉하신다.

지금은 쑥을 캐는 계절이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연거푸 바보 같은 소리나 해대다가 하는 수 없이 바구니와 과도를 챙겼다. 그렇다고 없는 쑥을 찾으러 다닐 수는 없는 일이어서, 이런저런 궁리 끝에 민들레를 생각해내고는 그것이나 캐자고 어머니를 설득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머니는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이 민들레를 쑥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만지작거린다. 

"맞어, 이것이 쑥이여, 아따 고놈들 참 연하기도 하다."
"아니 그런데 쑥은 왜 캐려고 해요?"
"아따 도련님도 참, 아 도련님 장개 가시잖어요. 쑥떡이라도 해야지요."

그 목소리의 정겨움이 정말로 한참 나이 어린 시동생을 대하는 자상한 형수 같다. 아들을 배려하는 마음과 시동생을 배려하는 마음의 색깔은 확실히 다른가보다. 정겨우면서도 어떤 의무감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어이없게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헷갈리기조차 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는 어머니의 오빠에서 다시 시동생이 되었다. 그 시동생이 장가를 가신다. 형수로서 달리 해드릴 만한 것은 없고, 쑥떡이라도 하고자 한다는 게 아마 어머니의 생각인 것 같았다.

덕분에 그날 밤은 온통 민들레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한나절내 캔 민들레를 데치고 무치고 볶고 된장국까지 끓여서 차린 민들레밥상으로 저녁을 마치고 설거지를 끝낸 다음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아홉 시 뉴스 시간이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중얼거린다.

"이상스럽네. 으째 저 사람이 대통령이까?"

나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발언이었다. 지난 일 년여 동안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뭐라고 논평을 한 적이 없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화면이나 그저 쳐다볼 뿐 내용에 대한 이해나 감흥이 전혀 없었다. 내가 옆에서 뭐라고 자꾸 말문을 열어보고자 해도 귀찮다는 듯 "몰라" 하실 뿐이었다. 그랬던 어머니의 입에서 대통령이라는 아주 어려운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는 얼떨결에 그냥 "대통령 알아요?" 한 마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노무현 찍었는디, 이상스럽네."

어머니는 연거푸 고개를 갸웃갸웃 하신다. 그러는 동안에도 뉴스는 계속되고, 여덟 살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어머니가 노여움이 가득한 소리로 한 마디 하신다.

"저런 도둑놈."

이제 더 이상 느긋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의 곁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고, 손도 만져보고 얼굴도 만져보고 온갖 별별 짓을 하고 있는데도 어머니는 별 반응이 없다. 내가 뭘 잘못 들었는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긍정적인 변화가 진행 중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어떻게 하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어머니의 돌아오고 있는 기억을 온전하게 붙잡을 수 있는 거지? 그런저런 생각으로 나는 아마 흥분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어머니가 안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고 부엌으로 나가 보니 어머니는 장의자에 새우처럼 구부린 채 잠들어 있었다. 깨워서 방으로 모셨지만 십 분이 채 안 되어 도로 나가신다.

그날부터 어머니와의 새로운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낮에도 가능한 한 방에는 안 들어가려 하시고, 밤이면 어김없이 크지도 넓지도 않은 장의자에 구부리고 누운 채로 잠을 청하신다. 방으로 들어가자 하면 여기도 방이라고 뿌리치고, 강제로 어떻게 방으로 모시고 나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 보면 어느새 밖으로 나와 새우처럼 구부리고 있다. 어떤 때 보면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잠이 든 척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를 벌(?)주고 계시다는 아들의 생각이 맞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좋을 텐데...
스스로를 벌(?)주고 계시다는 아들의 생각이 맞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좋을 텐데...김수복

"아, 미치겠네.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이러는 거냐고요, 정말."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려 보이며 소리를 지르는데 어머니가 문득 꿈결에서처럼 한 마디 하신다.

"내가 무신 복을 타고났다고 방에서 자."

할 말이 없다. 아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말해야 좋은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나의 생각은, 어쨌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너무 앞서가는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어머니는 지금 막내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당신의 죄(?)를 스스로 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와막내아들 #기억의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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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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