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금방 눈치 챌 거야

[아프리카 여행기 10 _ 미술시간] 케냐로 보낸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카드

등록 2009.12.24 23:11수정 2009.12.2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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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생애 최고의 음악

매일 아침 7시, 나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알람시계 삼아 낡은 2층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때도 늘 실감했지만 지금도 누군가 내게 생애 최고의 음악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학교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아프리카 케냐 아이들의 소리라고.


혹시나 필요할까 싶어, 취미삼아 배웠던 플루트 악기를 들고 갔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었다. 분명 아이들은 신기해하고 좋아하긴 했지만 사실 이 나라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악기였다. 이곳엔 타악기와 목소리만 있으면 최고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a 플루트 가져간 플루트는 마냥 어색해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플루트 가져간 플루트는 마냥 어색해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 박진희


한국 사람들은 죽어라 연습해야만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기가 막힌 화음을 넣어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 한 사람이 선창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알토, 메조소프라노, 테너로 노래를 같이 부르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악보 하나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노래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화음을 넣으며 노래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결국 나는 가져갔던 플루트를 동네에 나를 구경하러 온 아이에게 쥐어주며 억지로 사진 모델을 시키는 도구로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이곳에 저렇게 반짝이는 철제 악기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일곱 시 삼십 분부터 시작되는 수업으로 인해 이곳 초등학교는 새벽부터 산 너머 총총히 걸어오는 파란 교복의 천사들을 볼 수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조이홈스 고아원 2층 테라스로 나와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보는 것은 내게 가장 큰 낙이었다.

이곳 사람들 참 여유롭다.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다. 서울에 있을 때는 때론 10분, 1분, 50초가 빡빡하고 아까울 때가 너무 많았는데, 아프리카에서는 하루 종일 조이홈스 고아원 2층 테라스에 가만히 넋 놓고 있어도 누구 하나 핀잔주지 않는다.


간혹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며 소떼들이 지나갈 때, 바람이 나뭇잎을 훑고 지나갈 때, 저 멀리 보이는 초등학교의 시는 시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정도이니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행복했다. 현재를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을 걱정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행복하다.

#.2 너의 꿈을 그려봐


a 크레파스 아이들이 많아 두어 가지 색깔만이 돌아갔지만, 그래도 풍족했던 수업시간

크레파스 아이들이 많아 두어 가지 색깔만이 돌아갔지만, 그래도 풍족했던 수업시간 ⓒ 박진희


"음악 수업은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우리 이제 다른 수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시간표를 보니까 미술 수업이 전혀 없던데?"
"흭, 이번엔 네가 나서야 될 때인 것 같은데?"

흭은 자신의 부족한 영어실력에 자신 없어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껏 유창한 영어실력과 유창한 스와힐리어 실력이 없어도 충분히 잘해왔음을 상기시키며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가져온 알록달록한 스티커와 색종이 그리고 크레파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았다.

"가지고 온 색종이에 자신의 꿈을 그려보라고 하고, 그걸 하늘에 날리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와, 아주 좋은 생각이야!"


우리는 곧 1학년 아이들 수업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 보는 크레파스와 사인펜에, 아이들은 모두 상기된 표정들이었다. 얇은 색종이를 나눠주며 우리는 짧은 영어로 자신의 꿈을 그려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우리에겐 생소한 영국식 발음으로 '독타'(doctor) '쏘까'(soccer) 등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a 오랜만에 야외수업! 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서도 즐거운 아이들

오랜만에 야외수업! 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서도 즐거운 아이들 ⓒ 박진희


a 오랜만에 야외수업 오랜만에 야외수업이라 즐거워요!

오랜만에 야외수업 오랜만에 야외수업이라 즐거워요! ⓒ 박진희


크레파스와 사인펜을 많이 가져오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아이들은 분배된 한두 가지 색깔의 크레파스로, 그리고 나눠준 스티커로 열심히 자신의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기를 마쳤을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종이비행기 접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비행기 접는 법을 몰라 우리 넷은 아이들 서른 명을 상대하며 일일이 비행기를 접어주었다. 그리고 유난히 맑았던 날의 운동장으로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

내가 먼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다음부터는 똑소리나게 잘 따라하는 이 아이들은 노란 먼지를 일으키며 온종일 자신의 꿈이 그려진 종이비행기를 날려댔다.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했고, 우리는 이번 수업도 성공이라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3.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a 종이비행기 우리의 꿈을 담은 비행기가 하늘높이, 멀리 날아오르길!

종이비행기 우리의 꿈을 담은 비행기가 하늘높이, 멀리 날아오르길! ⓒ 박진희

여기,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축구공이 없어 노끈으로 묶어 만든 공을 차면서도 하루 종일 웃으며 지내는 맨발의 검은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면, 가끔 나는 눈물이 핑, 하고 돌았다. 가지고, 사고, 모으면서 애쓰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나는 저렇게 환한 웃음을 지어보인 적이 있었던가.

한국에서는 쉽게 구겨버렸던 종이 한 장, 바람을 빼 들고 온 축구공 하나로 여기 이 사람들은 이렇게도 즐거워하는데, 가끔 이 사람들에게 자랑처럼 꺼내놓았던 mp3, 디지털카메라, 노트북 들이 어쩐지 부끄러워질 때가 있었다. 내가 자랑할 것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구나. 이 사람들의 자랑거리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이었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와 동행자들은 여전히 문득, 내게 행복을 준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태어나 한 번도 함박눈을 보지 못한 아이들, 크리스마스날 여전히 풀풀 날리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맨발로 축구를 하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우리는 퇴근하고 시간을 내어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썼다.

더 많은 선물, 더 비싼 선물 보내고 싶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그리워하는 마음, 보고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크리스마스카드에 잔뜩 넣었으니, 아이들은 금방 눈치 챌 것이다. 우리의 카드가 생애 최고의 비싼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는 것을.

a 보고싶어요 행복을 꾹꾹 눌러담아 주었던 그대들이 그리워요

보고싶어요 행복을 꾹꾹 눌러담아 주었던 그대들이 그리워요 ⓒ 박진희

덧붙이는 글 | 두 달 간의 아프리카 여행기


덧붙이는 글 두 달 간의 아프리카 여행기
#아프리카 #여행 #사랑 #박진희박 #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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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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