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때 노친은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맺힌 탓이었다. 요즘 들어 '퇴원 착각' 속에 빠지시는 경우가 잦다. 옛날 일들과 지금의 현실과 꿈을 꾼 것들을 혼동하는 현상을 더러 보이기도 하는데, 퇴원 착각 속에 빠지시는 경우가 가장 잦은 것 같다.
어제도 내게 "차를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시더니, "그럼 지금 얼른 가자"며 서두르시는 모습을 보였다. "밥도 집에 가서 먹자"며, "얼른 짐을 싸자"는 말도 하셨다. 며칠 전에는 앞 병상의 할머니들을 가리키며, "저 할매들과 정두 많이 들었는디, 내가 오늘 퇴원허면 저 할매들 되게 서운헐 겨. 집에두 뭇 가구, 불쌍헌 할매들이여"하셔서 나는 난감한 가운데서도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추운 날씨가 좀 풀리기라도 하면 요양병원 원장님과 상의를 해서 노친을 하루나 이틀 집에 모실 생각을 하고 있다. 가능하다면 아내가 집에 있는 방학 동안만이라도 노친을 집에 모셔볼까 생각 중이다. 그래서 엊그제(10일) 서산의료보험공단에 가서 우선 휠체어를 한 대 빌려다가 병실에다 놓았다. 의료보험공단에서 병상 임대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만간 의료기 상사를 찾아가서 전기작동 병상과 이동식 변기를 임대하든지 구입하든지 할 생각이다.
전혀 기동을 못하시고 소변 줄을 달고 사시는 노친을 잠시만이라도 집으로 모시려면 방에 병상을 들여놓는 것은 필수일 것 같다. 또 하루 이틀이 아닌 동안 집에 모실 경우 방문 요양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그쪽 사항도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런 계획을 어제 어머니께 소상히 설명 드렸다. 귀가 어두워지신 노친께 이해를 시켜드리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도 노친은 당장 집에 갈 수 없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지셨는지 눈물을 흘렸다. 이상한 오해도 하신 나머지 "집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른 집에라도 가서 얹혀 살 텨"하며 어린애처럼 울었다.
요즘 우리 부부의 일상 생활은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가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요양병원의 아침식사 시간은 7시 30분, 점심은 11시 30분, 저녁은 4시 30분이다. 병원을 갔다오면 조금 후에 다시 가게 되고, 잠시 후에 또 가게 된다. 나는 짧은 글 하나 쓰는 일도 수월하지 않다.
자연 아침과 저녁의 평일미사 참례는 당분간 접기로 했다. 주일에도 오전 교중미사에는 참례하지 못하고 토요일 저녁 특전미사로 대신한다.
노친은 내가 오기를 되우 기다리시는 눈치다. 내가 조금 지체한다 싶으면 간병사에게 우리 아들 아직 안 왔느냐고 묻고, 전화를 걸어달라는 부탁도 하신다고 한다. 때로는 내게 "바쁜디 왜 또 왔어? 뭐 하러 자꾸 와"하시기도 하지만, 그게 반가움의 표현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노친은 내가 하루에 세 번이나 두 번은 꼭 온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나머지 내가 올 때까지 용변을 참는 경우도 있다. 기저귀에 배변을 하는 것은 시원찮기도 하고, 간병사에게 미안하고 창피하기도 한 모양이다. 웬만하며 변의(便意)를 참았다가 내가 병실에 도착하면 화장실에 갈 뜻을 표하기도 하는 것이다.
노친의 용변 문제를 포함하여 내가 요양병원을 자주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24시간씩 교대 근무를 하는 2명의 간병사 중에는 노친의 입에 의치를 끼워 드리고 빼드리는 일을 잘하는 이도 있다. 식사 후마다 뺀 의치를 칫솔로 잘 닦은 다음 작은 소독약물 상자 안에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간 부지런하지 않다. 그분이 당번인 날은, 오늘같이 눈 때문에 내가 병원을 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노친의 의치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이도 있다. 그분이 근무하는 날은 노친이 의치를 끼지 않은 채로, 잇몸으로 식사를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내가 매일 병원을 가므로, 의치를 끼워드리고 빼드리는 일 정도는 내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실에 다소 늦게 도착하여 노친이 이미 식사를 시작하신 상태에서 의치를 끼워드린 때도 있는데, 그때도 나는 간병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병사들 중에는 노인 환자들을 다루는 손길이 매우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소 거친 사람도 있다. 노인 환자의 몸을 돌려주거나 위로 좀 올려줄 때, 또 머리 밑에 베개를 넣어줄 때 조심스럽게 살며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박력 있게' 팍팍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간병사가 동작을 박력 있게 할 때마다 신음을 토하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친이 그것을 보고 내게 작은 소리로 하소연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나는 노친께 "어머니, 여사님(병실에서는 간병사를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혼자 여러 환자들을 돌보려면 너무 바쁘고 힘도 들고, 또 팍팍 힘을 써야 혼자서 환자 몸을 추스를 수 있어서 그러는 거니께 할머니들이 이해를 허야요"라는 말을 했다. 간병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하자면 간접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표시한 셈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걱정과 불안을 안지 않을 수 없었다. 간병사들의 성격과 손놀림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혹 거칠거나 무성의한 태도가 유난히 예민하신 노친께 자극을 주어 어떤 마찰이 빚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갖게 되었다.
간병사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보살핀다 해도 가족이 돌보는 것과는 다를 거라는 생각도 나로 하여금 더욱 자주 병원을 가도록 만들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을 요양병원에 맡기고 마음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간병사가 기저귀도 갈아주고 모든 것을 다해 준다'는 그 일반적인 사실에만 귀착하여 집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3>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는 지난 9일 서울에 가는 일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9일은 용산참사 희생자 다섯 분의 장례식이 거행된 날이었다. 나는 그 장례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시민상주'에도 기꺼이 참여하고 참가비 1만원도 일찌감치 보냈다. 그랬으면서도 9일 아침까지도 결정을 하지 못하다가 요양병원을 다녀오면서 서울 가는 것을 포기했다.
내가 서울을 간다면 점심때는 물론이고 저녁때도 병원을 가지 못하게 되고, 아내와 아이들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지난해 이맘때 운전면허를 따놓은 아들 녀석에게 운전 연습을 시키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내가 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니 가족들이 내 승합차를 이용할 수 있지만, '장롱면허' 소지자인 아내에게도, 일년 전에 면허를 따기만 한 딸아이와 아들 녀석에게도 차를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울에 가지 못하는 것을 몹시 아쉬워하며 인터넷 TV로 하루종일 장례식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점심때와 저녁때 요양병원을 갔다 오는 일 외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우리 가족은 하루종일 장례식 장면을 지켜보았다. 서울에 가지 못한 대신 인터넷 TV를 보면서 장례식에 함께 하고자 했다.
유족들과 관계자들과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께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감사하면서 인터넷 TV에도 무한히 감사했다. '자발적 시청료 납부'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다시 요양병원에 갔을 때 나는 노친께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 용산참사 아시죠? 용산미사 얘기 많이 들으셨죠? 내가 규애와 한결이를 데리고 용산미사에 여러 번 참례했던 거 잘 기억허시죠?"
노친은 "응, 알어"하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늘 장례식이 있었어요."
"그려?"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집에서 인터넷으로 장례식을 보다가 왔어요."
"그럼, 그 장례식에 뭇 간 겨?"
노친이 병상에서도 눈치 빠른 것은 조금도 변치 않은 것을 느끼며, 나는 어머니께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서울을 가면 점심때두 뭇 오구, 저녁때두 뭇 오잖요. 그래서 서울 가는 거 포기헸어요. 갈라구 헸다가…."
"그래두 괜찮은 겨?"
"괜찮요. 좀 섭섭허긴 허지먼, 마음이 크게 불편허지는 않요. 놀거나 다른 짓허느라구 뭇 간 것두 아니고, 어머니 때미 뭇 간 거니께, 아는 사람은 다 이해헐 규."
그래도 어머니는 미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미안해하시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또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께 어머니. 지금 당장 집에 데려가지 않는다구 너무 섭섭해허지 마세요. 날이 좀 풀리고, 어머니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아지면 집으로 모실 규. 그러니 조금만 더 참구 기다리세요. 아셨죠?"
"그려, 알었어."
노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노친은 어제 저녁때 눈물을 짓더니, 오늘 점심때도 눈물을 보였다. 뱃속이 불편하다며 식사도 거의 하시지 않았는데, 아마도 집에 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심과 야속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족과 떨어져 살아오신 분이 아니고, 평생을 가족과 함께 살아오셨기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신 것 같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부쩍 안타깝다. 날씨가 좋아지고 해동이 되면(노친은 암환자이시니 감기에 바짝 조심해야 한다) 잠시라도 집에 모실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오늘 저녁때도 눈을 맞으며 병원을 가고 오고 해야 했다. 오늘 내린 눈이 밤새 얼어붙기라도 하면, 내일 아침에도 병원을 가지 못할 것 같다. 아내와 함께 눈길을 밟고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눈이 참 밉다는 생각을 했다.
2010.01.13 20:52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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