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용산이 그리 먼 산이 아니란다

박민규 소설이 그려내는 우리 시대의 난장이들

등록 2010.01.29 09:19수정 2010.01.29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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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의 한 사내가 더운 여름날 오후 5시,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공원 벤치에 앉아 천하장사 소시지 두 개와 우유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소시지의 빨간 띠가 잘 안 떼어져서 짜증이 나다가 잠시 환불해 달라고 할까 고민하기도 한다. 마침 똥꼬(유아적 단어라 죄송!)가 가려워서 죽겠는데 남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살짝 긁으려니 그것도 힘들다.

한때는 잘나가던 자동차 세일즈맨(작가는 친절하게 미도자동차 사보 1993년 12월호 이달의 세일즈맨 기사를 참고하라고 일러준다)이던 사내는 몇 달째 실적이 없고 돈도 없고, 한창 잘나가던 때에 아파트 하나 장만할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 누가 뭐래도 참 열심히 살았는데…. 사내는 결국 남들은 아직 개척하지 않았을 화성을 목표로 삼아 자동차를 팔러 간다. 거구의 화성 여자를 만나고 몰고 간 럭셔리 세단을 세대나 계약할 수 있어서 의기등등하다. 지구인의 럭셔리 세단은 거구의 화성여자의 자위용으로 이용될 것이었다. (이 남자의 테스트 드라이브 장면을 유념하여 읽으시길!)


밥 때문에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고 집을 나선 사내가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미안하다. 면목이 없구나.
아빠도 열심히 사셨잖아요.
알아주니 고맙구나, 그런데 병태야
네 ?
우리 혹시 서민도 아니고 빈민… 그런 거 아닐까 ?
아무렴 어때서요.
몰라서 하는 소리, 용산이 그리 먼 산이 아니란다.
(박민규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소설에서 인용, 문학사상)

어찌하다 보니 박민규의 소설들을 꾸준히 읽었다. <카스테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최근에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연애소설까지 기억난다. 작가의 사진을 보면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광각렌즈에 얼굴을 들이댄 것 같은 포즈로 독자를 보는데, 짓궂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다. 소설의 제목들과 내용도 또한 범상치 않아서 그런 인상을 더 준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이런 제목들이 어떤가?

박민규의 소설을 읽을 때는 킥킥거리고 웃다가 너털웃음을 짓다가 가끔 웃어서 생기는 건지 마음이 짠해서 생기는 건지 눈물 같은 것이 찔끔 나오기도 한다. 구어체 같은 편한 문체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풀어가는 해학 넘치는 혹은 엉뚱한 이야기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오늘 한국사회를 본다. 박민규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변두리' 인간들이요, 특히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변두리로 내몰린 청년들이 많다. 이들을 꿈꿀 수 없게 내몬 것은 대체로 거대한 자본주의, 약육강식의 산업사회임이 너무나 자명하다.

차비 정도밖에 안되는 월급을 받으며 다른 인턴사원들과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하는 남자, 일흔세번의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후에 유원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남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지하철 푸시맨을 하는 남자, 집안이 망해서 친구집에 얹혔다가 갑을고시원에서 살게 된 남자도 있다.


이번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아침의 문'도 그런 주인공들이다. 자살 사이트에서 여럿이 만나서 자살을 감행하나 혼자 실패하고 재도전하는 남자와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재수가 없어서 갖게 되고 제때 중절도 못해서 낳아서 '처리해야' 하는 편의점 알바하는 여자. 이들이 한 순간의 조우가 '아침의 문'의 구조이다. 여자는 어느 허름한 옥상 옥탑방 구석에서 아기를 낳으려 하고 남자는 건너편 옥탑방 앞에서 목을 매려 한다. 그러다가 서로 보게된다. 세상에 나오는 자와 세상을 떠나려는 자…

이곳을 나가려는 자와
그곳을 나오려는 자는


그렇게 대면하고 있었다
(박민규 '아침의 문' 인용) 

마지막 장면을 한번 살짝 엿보자.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가, 매달린 태반을 어쩌지 못해 통째로 안아 올린다. 그의 품에서 아이는 울다, 훌쩍인다. 바닥의 콘크리트보다도 무뚝뚝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박민규 '아침의 문' 인용)

얼마나 뜨거운 만남인가. 그래, 인간이라 부르는 존재는 (괴물이라 부르기 뭣해서 인간이라 불러도) 적어도 콘크리트보다 따뜻하지 않은가…

2010년 한국, 아직도 박민규가 그려갈 청년들은 너무나 많다. 콘크리트처럼 견고하고 차가운 자본주의 틀에서 애당초 꿈을 접은 채, 계약직으로 일용직으로 전전하거나 하루의 밥조차, 잘 곳조차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청춘들은 얼마나 많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가. 그래도 '아침의 문'이다. 작가는 희망을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난장이들은 같이 서로 보듬고 아직 따뜻한 심장으로 서로 안아주어야 한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한겨레출판, 2017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예담, 2009


카스테라 - 박민규 소설

박민규 지음,
문학동네, 2014


#박민규 #아침의 문 #이상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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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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