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졸업식 때 훈화도 못하고 울보 선생 되다

등록 2010.02.13 10:43수정 2010.02.1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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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졸업식 아름다운 동행을 약속하며

졸업식 아름다운 동행을 약속하며 ⓒ 박병춘


지난 10일,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앨범, 기념품, 상장, 졸업장을 나눠주고 마지막 훈화를 하려고 하는데 그냥 눈물이 나왔습니다. 제법 쓸만한 이야깃거리를 준비했지만 하나도 전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전하고 정든 교실을 떠나 보냈습니다.

"더 잘 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a 졸업식 지역 국회의원인 박병석 의원이 시상을 하고 있다.

졸업식 지역 국회의원인 박병석 의원이 시상을 하고 있다. ⓒ 박병춘


그리고 나서 교실을 떠나는 제자들과 교실 문 앞에서 악수를 나누다가 그것도 못 참아서 중간에 교무실로 올라왔습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옥상에 올라 실비를 맞으며 상념에 잠겼습니다. 가족, 친구끼리 기념 사진을 찍는 제자들을 옥상에서 내려다보는데 실비보다 굵은 눈물이 자꾸만 흘렀습니다.

'바보같이 내가 왜 이럴까?'

대학에 가야 할 제자들이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고 졸업식을 맞이해야 하는 일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것도 한없이 착하고 성실한 제자가 성적이라는 것 때문에 예비 합격자 후보 순위가 수십 번으로 밀려 재수를 해야 할 참이니 교사로서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a 졸업식 사랑하는 제자들과 찰칵!

졸업식 사랑하는 제자들과 찰칵! ⓒ 박병춘


평일이면 정규 수업을 마치고도 심야 자율학습을 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주말 휴일까지학습에 매달려야 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랬던 제자들에게 개인적 욕망을 모두 버리라며 조퇴 허락을 안 해주고, 호루라기를 불며 지각 단속을 하고, 수많은 디지털 기기와 컴퓨터를 제어하고 그들만의 공간을 차단해야 했던 야만이 자꾸만자꾸만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방송마다 졸업식 추태 동영상이 범람하고 그에 대비되는 착한 졸업식도 조명됩니다. 도대체 어디서 온 문화인지 모를 일입니다. 중학생들이 옷을 벗고, 벗깁니다. 여고생들이 옷을 벗고 바닷물에 빠지고, 속옷 차림에 거리를 행진하는 중학생들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릅니다.


탄식을 하고,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아이들보다 그 아이들을 둘러싼 교육환경을 걱정합니다. 12년 동안 공부한 과정이 대학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그들만의 욕구가 차단돼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철없는 아이들을 무조건 감싸는 것도 무리이긴 하지만, 그들을 위해 고치고 바꿔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a 졸업식 대외상 수상자들이 상장과 상품을 받고 있다.

졸업식 대외상 수상자들이 상장과 상품을 받고 있다. ⓒ 박병춘


아무리 그래도 희망을 가집니다. 졸업식 전날, 제자들이 졸업식 예행 연습을 하려고 학교에 왔더랬습니다. 그 가운데 S군이 '봉사활동 확인서'를 담임 교사인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S군은 이미 정시 모집에 합격하여 봉사활동 내용이 학생부에 기록된들 대학입시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도 나흘 동안이나 대전조달청 도서실에서 참다운 봉사활동을 한 것입니다.


자연계열에서 공부하다가 자신의 적성을 만화 그리기라고 판단한 K군이 대학에 합격하여 풍경화 한 점을 그렸습니다. 첫 작품이라며 잘 말아 고무 밴드로 묶어서 졸업하는 날 저에게 주었습니다. 반드시 액자에 넣어 제 방에 걸어놓으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역시 자연계열에서 공부했으나 문학도의 꿈을 갖고 있던 한 제자는 언어영역 성적이 잘 나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고3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제 속을 조금 썩게 했으나, 마지막 종례를 마치고 나자 저와 사진을 찍으러 교무실에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쩍 커버린 제자를 보며 그 어떤 유감도 앙금도 남기지 않고 뜨겁게 포옹했습니다.    

a 졸업식 "애썼다!" "감사합니다!"

졸업식 "애썼다!" "감사합니다!" ⓒ 박병춘


저는 행복한 고3 담임이었습니다. 봉사를 아는 제자, 적성을 찾아 자기 길을 걸어가는 제자들이 있는 한 우리 교육에 희망은 있습니다. 특히 오직 대입준비 고3이라는 상황에서도 여름방학 때 학급원 전체가 대전에서 남해까지 일박이일 체험활동을 했던 추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좀 더 잘 해주고 싶었지만 지독한 입시경쟁교육 앞에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보다 세심하게 교재 연구를 하고 보다 열정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잘 가르쳤는지 돌아보니 아쉬움이 큽니다. 더 많은 농담과 격려와 사랑으로 고3 스트레스를 풀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규제와 억압 속에 움츠렸던 가슴 활짝 펴기 바랍니다.

졸업하는 날 울보 선생이 되어 제자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전해주지 못해 후회막급입니다. 그러나 알짜배기 사제관계는 졸업 후에 형성된다고 믿어서 졸업식 날 못 다 나눈 이야기는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엮어갈 수 있겠지요.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열심히 백묵을 갈다 보면 뜨겁게 포옹할 일 많이 있겠지요. 글을 맺으며 같은 말을 또 하고 싶습니다.

"더 잘 해 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졸업식 #고3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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