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얼마 전 고장의 한 '상조회' 월례 모임에 가서 접한 일이다. 며칠 전 모친상을 당한 후배가 장례 기간 문상을 와준 상조회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때 흥미로운 얘기들이 오갔다. 몇 년 전 심장 관련 수술을 하셨던 그 후배의 노친이 그간 건강하게 잘 사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세 시간만에 운명하셨다고 했다. 모두들 '복된 죽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쓰러지신 후 병원에서 세 시간 만에 돌아가셨으니 본인도 고생을 하지 않아서 좋고, 자식들도 고생시키지 않아서 좋고, 얼마나 복 받은 일이여. 그게 다 노인네도 복이 많고 자식들도 복이 많은 덕이여."
누군가의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는 중에 "긴 병에 효자 없는 법이여"라는 말도 나왔다. 그 말이 며칠 전 모친상을 당한 후배의 입에서 나온 사실과 하필이면 바로 내 면전에서 나온 사실에서 나는 묘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 후로도 계속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니며 노친을 돌보고 이리저리 여러 가지로 몸 쓰고 시간 쓰고 살면서 나는 때때로 괜히 그 친구의 그 말을 떠올리곤 한다. 마치 내가 지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 같아서 좀 쑥스럽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그 말이 결코 옳은 말도 아니고, 그 말을 옳은 말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지금 노친의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회복기에 들어섰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암세포에 의한 골반 뼈 골절로 걷지 못하게 된 87세 노인이 다시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내게 가지게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걷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또 연세가 있으시니(노인네 건강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다. 노친이 다시 걷게 되는 가쁨은 맛보지 못하더라도, 자식들이 최선을 다한 상황 속에서, 큰 고통을 겪지 않는 가운데, 자식들에게 조금도 섭섭한 마음 없이 섧지 않게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노친에게나 자식들에게나 그보다 큰 복은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2>
그동안 노친 몸의 암세포들에 대처하기 위해 내 나름으로 힘닿는 데까지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웅담, 흑마늘, 홍삼 등도 많이 사용했다. 여러 가지 정보를 입수하고 활용하는 가운데 '건자두'가 변비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쪄서 말린 자두를 지금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회전 전자파를 방출하는 '바이오 기공수기'를 구입하여 계속적으로 기공수를 만들어 노친께 공급한다. 기계 위에 물병을 4시간 이상 올려놓으면 물이 알칼리 수와 육각수로 변하는데, 임산부 자궁 안의 양수와 똑같은 성격의 물이라고 한다. 컵에 물을 담고 계란을 깨쳐 넣은 다음 일주일이 지나도 계란의 모양이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물에다가 '회전전자파 광합성 녹말'을 섞어서 하루 세 컵씩 공복에 드시도록 계속 공급하고 있다. 그 녹말은 수원 아주대학교 모 교수님이 개발한 물질이다. 현재 각종 암환자들에게 임상 실험 중인 그 녹말을 나도 용케 구해서 사용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주대를 다니다가 2주일에 한 번씩 다니던 중 지금은 고맙게도 그 교수님이 택배로 보내 주시는데, 노친 몸의 암세포 진행을 제어하고, 갖가지 약물 복용에 의한 변비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확신한다.
하루 세 번씩 끼니 시간에 맞춰 병원을 가다보니 이제는 병원 가는 일에 관성이 붙었고, 자연스럽게 일의 순서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병원에 가면 맨 먼저 노친이 공복 상태임을 감안하여 회전전자파 광합성 녹말을 탄 바이오 기공수를 한 컵 드린다. 의치를 씻어서 끼워 드린 다음 건자두를 드린다.
밥 쟁반들을 실은 수레가 오면 요양사를 도와 병실 할머니들께 일일이 쟁반을 날라다 드린 다음 노친의 식사를 도와 드린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집에서 가져간 과일(주로 마누라가 속껍질까지 벗긴 오렌지)과 홍삼정과 등을 드리고 바이오 기공수를 드린다. 노친 턱 밑에 작은 대야를 놓고 의치를 빼 드린 다음 칫솔에 치약을 묻혀 손에 쥐어 드린다.
의치와 칫솔을 가지고 화장실에 가서 씻어오면서 현관 정수기에서 온수를 한 컵 담아온다. 물을 담아온 소독약 상자에다가 의치를 넣고 소독약 한 알을 담근 다음 제 자리에 놓고, 비치함 서랍에서 숟가락과 가위를 꺼낸다. 가위로 약 봉지들을 자른 다음 갖가지 모양의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약들을 숟가락에 담는다. 그 약을 어머니 입에 넣어 드리고 정수기 물 컵을 입에 대드린다. 약을 복용할 때는 알칼리 수가 아닌 보통 물을 이용해야 한다.
그런 일들을 마치고 식탁을 접어놓은 다음에는 노친의 등을 두드려 드린다. 등뼈 양옆을 따라 내려가면서 손가락 끝으로 뼈 사이를 지그시 누른다. 그런 다음 등 전체와 엉덩이 부위를 골고루 긁어 드린다.
등 안마와 지압과 긁기를 마친 다음에는 양쪽 팔과 다리를 번갈아 주물러 드린다. 손바닥 발바닥도 누르고 긁고 한다. 아직 두 무릎의 오금이 병상 바닥에 온전히 닿지 않기 때문에 지그시 눌러서 닿게 하는 운동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 일을 하루 세 번씩 지속하니 꽤 많은 양이 축적되는 셈이다.
식사 돕기부터 그 모든 일을 하는데는 대개 40분 정도 걸리는데, 노친이 식사 후 화장실이라도 가게 되면 한 시간을 넘기기도 한다. 노친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가까운 로비에서 체조를 한다.
<3>
아침 7시 20분쯤 병원에 갔다가 8시 20분쯤 돌아오면 아내가 출근하고 없는 집안 정리를 하고 나서 컴퓨터 앞에 앉는데, 잠시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면 금세 다시 병원에 갈 시간이 된다. 오전 11시 20분쯤 병원에 갔다가 12시 20분쯤 돌아오면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2시쯤에는 걷기 운동을 나간다.
촉박한 일거리나 특별히 외출할 일이 없으면 오후에는 걷기 운동을 한다. 자동차로 5분 거리인 '장명수' 해변으로 가서 두 시간 정도 걷기 운동을 하는데,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에 의한 상이 등급 6급을 받았을 정도로(한 달 약값으로 30만원씩을 지출하고 사는) 심각한 내 건강문제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걷기 운동을 마치면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요양병원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5시 30분쯤 집에 돌아오면 거의 녹초가 된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꼼짝도 하기 싫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녁 평일미사에 거의 참례하지 못하고, 화요일 저녁의 레지오 모임에나 겨우 참석한다.
원고 작업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한다. 짧은 글 하나 쓰는 일도 단참에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소설 쓰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아침과 점심은 병원에서 노친이 남긴 밥으로 해결한다. 노친이 사용한 숟가락을 그대로 사용한다. 더러 점심 약속을 하는 경우도 있고 모임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말을 제외하고는 아침과 점심은 병원에서 해결하고 저녁만 집에서 먹는다.
병원의 노친 곁에서 노친이 남긴 밥으로 두 끼니를 해결하고 또 노친이 사용한 숟가락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노친께 좋은 감정을 갖게 하리라고 믿는다.
내가 아내의 출퇴근 시간에 요양병원에 가 있는 탓에 아내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걷기 운동을 하는 셈이 되었다. 혼자 아침을 먹고, 걸어서 출근을 하고 걸어서 퇴근을 하는데, 간혹 내가 늦게라도 학교에 가서 아내를 태워오는 때는 시장 볼 일이 있는 경우이다.
주말에는 서울에서 대학생 딸아이와 아들녀석이 와서 아빠를 쉬게 해준다. 이제는 자동차 운전이 제법 능숙해진 아들녀석이 누나를 태우고 주말에 두세 번 정도 병원엘 가서 아빠와 똑같은 방식으로 할머니를 돌보아 드린다.
대전에서 사는 고교 교사인 막내 동생도 일요일에는 거의 매번 와서 노친을 돌보아드리고 오후에 서천의 직장으로 돌아가곤 한다. 안산에서 사는 누이동생도, 안양에서 사시는 누님도 한 주 걸러 오는 일을 접지 않는다.
모두들 노친의 변한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새롭게 희망을 갖는다. 노친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모습, 이제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병상생활을 하시는 모습, 다리에 조금씩 힘이 생기는 상황에서 지레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생활은 요양병원의 노친과 '함께' 돌아간다. 특히 노친을 모시고 살아온 나는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가는 그 고정적인 '일과'를 중심에 두고 생활한다. 물론 어렵고 힘들지만 내 나름대로 자식된 도리를 다하려는 뜻이며, 그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덕으로 여긴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놀라고 감탄하기도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만일 직장에 매인 몸이거나, 바쁘게 사업을 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맘은 있어도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대개는 생활 조건이 어려워 나처럼 하지 못할 터이다.
병상의 노친께 행복감을 갖게 하는 일(노친은 '행복하다'는 표현을 했다), 그것이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이니, 내 '조건'에 대해 하느님께 무한히 감사할 따름이다.
2010.03.11 14:04 | ⓒ 2010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