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정 청사에서 만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뜻

지난 30일 오후 상하이엑스포 개막 하루 앞두고 임정청사 다녀와

등록 2010.05.06 11:34수정 2010.05.0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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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임정 태극기 당시의 태극기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임정 태극기 당시의 태극기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 김철관


지난 4월 30일 오후 윤봉길 의사(1908~1932) 사적지가 있는 루쉰 공원 정문을 나와 무작정 택시를 잡아 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는 루완(盧灣)구 마당(馬當)로 향했다. 20여분이 지나자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했다.

순간 택시로 온 길이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하기 위해 홍커우 공원(루쉰 공원)으로 갔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다. 대체로 가까운 거리였다.

a 임정 현판 청사 정문에 있는 현판에는 '대한민국 림시정부' 라고 써 있다.

임정 현판 청사 정문에 있는 현판에는 '대한민국 림시정부' 라고 써 있다. ⓒ 김철관

임시청사건물 벽면에는 중국어로 '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 바로 밑에 한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라고 새겨져 있었다. 입장료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과 똑같이 15원(위안)이었다. 매표소에 근무하는 중국 여성 안내원들이 입장료를 받았다. 한국말도 제법 구사하는 안내원도 눈에 띠었다.  중국어로 參觀券(참관권)이라는 입장권을 가지고 매표소 좌측 옆 골목을 5미터 지나자 역사적인 임시정부 청사 정문이 나왔다.

들어가는 입구 벽면에 사각형 동판 태극 문양 원 안에 가로 쓰기로 '대한민국 림시정부'라고 새겨졌고, 바로 밑에 중국어로 '大韓民國臨時政府'라고 표기돼 있었다. 바로 옆  '大韓民國臨時政府廳舍複原'이라고 비석에는 1차 1993년, 2차 2001년 라고 적었고, 중국과 한국어로 복원 근거를 설명해 놓았다.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한 역사 깊은 장소이다. 이 청사는 상해시 정부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등 한중양국의 협조로 이곳을 떠난 지 60년만인 1993년 4월 13일자 1차 복원을 하였고 2001년 12월 건축물을 전면 보수하고 전시시설을 확장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유적지로 단장하였다. 2001년 12월 19일"

골목길을 쳐다보니 허공에는 거미줄 같은 전기줄이 집과 집을 잇고 있었고, 인근 주변건물 중국인 집에는 빨래를 말리는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a 김구 선생 흉상 바로 입구 1층 전시장에 마련된 김구 선생 흉상

김구 선생 흉상 바로 입구 1층 전시장에 마련된 김구 선생 흉상 ⓒ 김철관


청사 입구에 들어서자 임시정부 활동과 관련된 영상물을 보여줬다. 스크린 앞에 놓인 김구 선생의 흉상이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흉상 바로 옆 벽면 액자에 걸린 양심건국(良心建國)이라는 성어가 임시정부의 정체성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반대 편 벽면에는 세계 각계인사들이 방문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안내원은 이날 오전 이명박 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적은 '애국선열들의 뜻을 이어받아 선진인류국가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방명록을 보여줬다. 2층 김구 선생 집무실 입구에는 흉상으로 만든 비서가 업무를 보고 있었다. 네모난 접견실(의자 네 개) 탁자를 두고 정면에 김구 선생이 집무를 하고 있었다. 옆 벽면에는 태극기가 보였다. 김구 선생 책상 옆에는 잠을 잤던 조그만 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a 김구 선생 집무실 문 앞 비서가  앉아있고  테이블을 두고 김구 선생이 집무를 하고 있다.

김구 선생 집무실 문 앞 비서가 앉아있고 테이블을 두고 김구 선생이 집무를 하고 있다. ⓒ 김철관


a 임시정부 집무실 벽면 액자에 애타애기, 광명이라고 쓴 한자 가 보인다.

임시정부 집무실 벽면 액자에 애타애기, 광명이라고 쓴 한자 가 보인다. ⓒ 김철관


김구 선생 집무실을 지나 임시정부 집무실 탁자 위에는 찻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바로 위 벽면에 걸린 애타애기(愛他愛己), 광명(光明) 등의 글귀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상해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4월~1932년 5월까지)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외교문서들도 벽면에 가득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윤봉길(尹奉吉) 의사(1908~1932)와 이봉창(李奉昌) 의사(1900~1932)의 업적이 나란히 전시된 곳이었다. 당시 의거 사진과 신문 보도 내용을 소개해 놓았다. 거사 직전 김구 선생과 촬영한 윤봉길 의사의 결연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이봉창 의사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이봉창 의사의 거사에서 기인했다고 알려져 왔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일본천황이 만주국 황제 부의와 함께 일본 수도 도쿄(동경) 교외에 있는 요용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도중 이봉창 의사는 두 개의 폭탄을 던졌지만 실패했다.

a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좌)는 활짝 웃고 있고, 윤봉길 의사(우)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을 담고 있는 사진 밑에 당시 의거 사실을 알린 <동아일보> 기사가 전시돼 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좌)는 활짝 웃고 있고, 윤봉길 의사(우)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이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을 담고 있는 사진 밑에 당시 의거 사실을 알린 <동아일보> 기사가 전시돼 있다. ⓒ 김철관


당시 윤봉길 의사는 평상시처럼 홍커우 공원에서 야채행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날 윤 의사는 공원에서 신문을 보고 이봉창 의사의 일본천황 저격 소식을 접하게 됐다. 당시 공원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봉창 의사 저격 소식을 보고 웅성거리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이날 윤봉길 의사는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둘 다  김구 선생이 이끈 한국애국단 소속이었다. 1931년 당시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했고, 나아가 무력을 앞세워 중국 대륙을 침략할 온갖 획책을 부리고 있을 때였다. 이봉창 의사 동경 거사가 실패한 지 3개월 후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 거사를 성공시켰다. 당시 일본 경찰은 두 거사의 배후를 김구 선생으로 지목하고 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이날 김구 선생과 인연을 맺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거사를 결행한 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a 임정 기록사진 상해 임정 청사 내에는 당시의 많은 기록 사진과 기록물들이 전시됐다.

임정 기록사진 상해 임정 청사 내에는 당시의 많은 기록 사진과 기록물들이 전시됐다. ⓒ 김철관


1층부터 3층까지 전시장을 따라갔다. 전시장은 1층 들어가는 전시장, 2층 전시장, 3층 전시장에 나가는 쪽으로 3층 전시장, 2층 전시장, 1층 기념품 판매장 순으로 돼 있었다. 특히 2층 전시장에는 중경시기(1940~1945)의 임시정부 활동사진과 문서, 기록 등도 잘 정리돼 있었다.

현재 마당로(馬當路) 306번지 4호(과거 普慶里 4호) 있는 임시정부 청사는 연립주택형 3층 건물이었다. 지난 1925년에 건립된 중국 근대식 석조고문 구조의 건축양식을 따랐다. 1926녀부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거사 직후인 1932년까지 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창설됐고, 수차례 이전을 걸쳐 1926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루쉰 공원(홍커우(虹口)) 공원 폭발 거사가 일어 난후 부득이하게 상해를 떠났다. 이곳 임시정부 청사에서 공무를 보는 시간이 가장 길었고, 가장 완벽하게 보존 된 곳이기도 하다. 1990년부터 이곳의 복구사업은 상해시로만구 정부 및 관계자들의 많은 지지와 도움을 받았고, 수많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외국 관광객들도  복구사업에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 나오는 마지막 1층 판매대에는 임시정부 관련 기념품은 없었고 온갖 중국기념품을 파는 모습을 보니 씁쓸하기도 했다. 밖으로 나와 임시청사 입구에서 함께 갔던 오세철 사진작가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임시정부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다시금 생각했다. 임정청사를 둘러보고 나와 한참동안 서성거렸다.

a 청사 골목 임시청사 입구 골목의 풍경이다.

청사 골목 임시청사 입구 골목의 풍경이다. ⓒ 김철관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주변 구석구석을 카메라 프레임에 담았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택시를 타고  숙소인 명성호텔로 돌아 왔다. 오는 길은 마치 러시아워여서 상해시는 온통 차로 북적거렸다. 택시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려 호텔까지 걸어가는 추억을 만들었다. 4월 30일은 윤봉길 의사 사적관과 임시정부 청사를 다녀 온 것으로 하루가 지나갔다.

이날 저녁 상하이 카페 거리인 '신천지'에서 한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한국기업연합관 등의 전시기획을 맡았던 '시공테그'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중국의 비전, 세계 192개 나라 파빌리온(문화관) 이야기 등 상하이엑스포 관련 전반의 이야기 듣고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날(30일)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내일 상하이엑스포 개막 관람과 취재 일정을 점검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기구 윤봉길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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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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