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시 원폭 피재지 시가지 복원도'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가 펼친 현지 주민들의 열성적인 조사 활동에 기반하여 복원해낸 원폭 피폭 당시의 주택과 거주자 성씨 복원도. 이 안에는 조선인의 성인 '김'이라는 이름도 포함돼 있다.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
1945년 미국은 핵무기를 투하해놓고, 원자폭탄 피재 조사단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보낸다. 그 조사단이 최초로 '그라운드 제로'에 한자로 '폭심', 영어로 'Centre'라는 글자를 새겨 작은 막대를 꽂는다. 그 막대가 사라진 후, 1946년에 간단한 형태의 두번째 중심비가 세워졌고, 1948년에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의 표, 지상 500에서 작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세번째 비가 시민들의 주목 속에서 세워진다.
당시 마츠야마 쵸(당시 행정명, 폭심지로부터 동서남북 250m)에는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에 따르면, 이곳에는 약 300세대에 1860여 명의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혼자 방공호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피폭을 당하고 살아남은 7살의 소녀 스가와라 타에코를 포함한 단 2명의 소녀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즉사했다고 한다. 당시 나가사키시 인구가 21만 명으로 전체 피폭자 수를 헤아리면 약 7만 5천여 명이 사망, 7만 5천여 명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추정치에 불과하다. 65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통계는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가사키시에서는 '마츠야마 마치 원폭 피폭지 복원의 회' 등이 주축이 되어 당시 이 지역에 몇 채의 집이 있었고, 각각의 집에는 누가 거주했는지 그 이름을 되살린 복원도가 제작되었다. 공원내에 그 복원도가 설치돼 있다. 1945년도의 각종 주택 설계도나 도시 설계와 주민 거주와 관련된 행정 기록을 필사적으로 추적하여 복원한 것이라 하는데 간간이 공란도 아직 남아 있다. 빈집이었는지 혹은 누가 살았는지를 도저히 밝혀내지 못한 채 미궁속에 갇혀 버린 곳이다.
마츠야마 마치 171번지는 하필이면 '그라운드 제로'에 있었으니 주택들이 전파, 전소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하얀 재가 되어버린 것은 물론이다. 당시 우연히 작은 볼일이 있어서 폭심지 부근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을 포함하여 신원도 판명되지 않은 채로 화장된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온가족이 전멸한 경우도 많았다. 검게 타버린 건물 더미 속, 누구의 것인지 헤아려 볼 수도 없이 공원 밑에 파묻혀 있는 그 유골들은 아마도 누군가의 엄마이며 아기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린 아이였을 것이다. 당시 젊은 남자는 군대와 전선으로 갔고, 학생들도 동원학도나 근로정신대라는 이름 등으로 강제동원되어 군수공장에서 저마다 제 몫의 일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나가사키 증언의 회'의 모리구치 마사히코 씨(71세)는 "이곳에 조선인이 살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복원도를 보면 그속에 새겨진 거주자의 성씨 중 김씨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 중에서 이런 성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므로 조선인이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공원보다 지층이 약 2~3m 가량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공원에서 계단을 타고 2m쯤 내려간 곳에 당시 원폭피해를 입고 타다 남은 어느 가정집의 식기구와 가재도구 잔해들이 피폭당시의 지층과 함께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공개되고 있는 부분이며, 공원 재정비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