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61회)

약속 <1>

등록 2010.08.03 09:56수정 2010.08.0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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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 부인의 얼굴은 청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평상복 차림이었으며 머리맡엔 준비해둔 유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의 명운이란 게 참으로 기묘한가 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인데도 눈 감으면 떠오르고, 달이 밝거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멀리 떠난 님의 모습을 그리다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건 님께서 남긴 정 때문이라 봅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수놓아져 있는 유서였다. 세 해 전, 남편은 곡성 고을 원으로 부임하던 길에 목숨을 잃었었다. 사인은 심장발작으로 무엇에 크게 놀라 목숨을 잃었다는 게 검시를 마친 오작사령의 시각이었다.

급히 해남으로 사람을 보내 집안에 큰일 생겼으니 아들은 급히 돌아오라는 내용을 간략하게 전한 것인데 이틀이 지났을 무렵, 생각지도 않은 불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아들의 죽음이었다. 검안에 나선 관찰사는 검시기록을 작성할 때 몇 마디 안타까운 사연을 잊지 않고 집어넣었다.

"불행은 예고가 없는 것이라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번처럼 부자가 객지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흔한 게 아니다. 부친 김성겸은 크게 놀라 심장 발작을 일으켰고, 아들 김윤호는 독충에 물려 목숨을 잃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연락을 받은 사헌부에선 정약용을 파견했다. 현장으로 떠나면서 그는 나직이 말했다.
"김성겸은 호인이라 원한 살만한 사람이 아니다. 검시기록을 살피면 동공이 열린 채 무엇에 크게 놀란 흔적이 역력하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또한 해남으로 떠난 아들은 주막집에서 독충에 물려 죽었는데 함께 투숙한 사람에 의하면 독사 같은 게 아니었나 싶지만 진위는 가리지 못했다. 관원들이 하는 일은 고작 독충에 물려 명이 끊긴 주검을 보고 흔적만 살폈을 뿐이나 나는 두 사건에 대해 몇 번을 생각했어도 시비를 가릴 수 없는 데다 부인마저 자진했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수사관의 사적인 얘기일 수 있었다. 사람이 살해 되고, 살해 원인을 밝히는 수사관으로서 한번쯤 품은 의혹일 수도 있었으나 주검의 살해 방법과 동기를 밝혀야 할 수사관이 가질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었다. 사헌부를 나설 무렵 신임 관원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죽은 김성겸의 부인이 약을 먹고 자진한 그날, 도둑 하나가 그 집 담을 넘다 잡혀 왔습니다."

정약용의 물음이 빨랐다.
"어딨는가, 그 자는?"
"지하 감옥입니다.."


서둘러 그곳으로 가 보니 턱 밑 수염은 넉넉히 자랐고 체격이 다부져 뵈는 사내가 행감을 친 채 두 팔을 엇비슷이 찔러 넣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록 도둑으로 잡혀 왔지만, 당당한 위용은 결코 좀도둑질 할 놈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안내한 관원이 한 마디 내놓았다.

"생긴 건 저래도 돼먹지 않은 걸 몸에 지녔습니다. 조선 여류 시인이 쓴 <율간초(栗簡抄)>란 책자를 지녔지요. 그것은 학문을 꽤나 했을 때 읽을 수 있는 서간집이니 저 자의 머릿속엔 똥물은 아니 든 모양입니다."

"그것뿐인가?"
"상아 도장도 있었습니다."
"어디 잠깐 보세."

정약용은 영치돼 있는 곳으로 가서 물건을 살폈다. <율간초>는 당시 유행하던 서간집으로 일종의 아녀자들이 쓰는 편지 글이었다. 남편을 사별하거나 멀리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라든가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마음이 대부분이었다.

특이한 점을 꼽자면 서간집은 한글이 아닌 한문 양식이었고, 상아 도장은 성호(星浩)라는 두 글자만 새겨 있을 뿐 특별한 점은 없었다.

"이름이 뭔가?"
"독대(禿大)라 합니다."
"영치된 물건은 자네 것인가?"
"그렇습니다."

"글을 읽은 것 같은데 무슨 이유로 월장했는가."
"친구 집이라 생각하고 담을 넘은 것 같은데 오랜만에 오는 길이라 잘못 짚은 것 같습니다."
"사실인가?"
"증명할 수 없어 답답합니다."

정약용은 고개를 끄덕이다 물러나오더니 서과와 김성겸의 집으로 향했다. 세도를 누리던 권문세가답게 널따란 집 안팎은 향내가 진동했고, 몸채 지붕 위엔 어처구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열두 가지 동물 형상인 어처구니를 만들어 지붕 위에 둔 것은 풍수적 비방인 염승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풍수적 비방은 고려 때 성행했다는 말에 서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아는 바 어처구니 동물 형상은 부잣집에서 멋을 부리고 장식을 목적으로 사용돼 온 것이라 알았기 때문이다. 몸채를 돌아나가면서 정약용이 실마리를 풀었다.

"풍수적인 비방은 고려 때 성행했다. 도선 선사가 쓴 <도선비기>나 <옥룡자요결>은 한결같이 예언자적인 성격을 띠는 책이지만, 원류는 풍수다. 그때로부터 조선조에 이르도록 양택이나 음택 풍수가 활발해진 게지."

"나으리, 그래서 고려 때를 풍수의 시작으로 보나요?"
"만월대 유적이나 개성 거리 곳곳, 또는 인근 산악엔 풍수비방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를테면 좌견교(坐犬橋)라는 것도 그렇고 ···, 특히 개성엔 다섯 가지 동물 이름을 본딴 유적이 있다. 묘정(猫井)이라느니, 상암(象岩)이나 구암(狗岩), 호천(虎泉) 등이 그런 것인데, 이런 지명은 만월대 동남쪽에 위치한 자남산(子南山)에 대한 염승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것과 어처구니가 관계있나요?"

"있고 말고! 풍수적으로 만월대는 커다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야. 쥐란 동물을 생각해 봐. 얼마나 의심 많고 놀라기를 잘 하는가. 그런데 자남산이 새끼 쥐 형상이니 어미 쥐에 해당하는 만월대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지. 궁 안이 편안하려면 함부로 돌아다니는 새끼 쥐를 보호해야 되니 자남산에 다섯 가지 동물 유적을 만든 것이야."

고양이는 어린 쥐가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개는 고양이의 움직임을 감시했으며, 호랑이는 개를, 다시 코끼리가 호랑이를 감시했다. 이렇게 상호 견제함으로써 만월대에 머무는 늙은 쥐가 평안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어처구니는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 만든 것으로, 조선의 궁궐이나 사대부가에선 빼놓지 않았다. 만약 집을 지을 때 어처구니를 빼놓았다면 큰일이었다. 해서 엉뚱한 사단이 발생하면 '어처구니 없다'는 말을 사용하지."

정약용의 얘긴 유씨 부인의 처소가 가까워지면서 그쳤다. 섬돌 아래 집에서 일하는 마흔 어림의 사내가 서 있고, 주위엔 사헌부에서 파견한 관원들이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통제시켰다. 관원이 집안 사정을 알렸다.

"집안엔 살림을 도맡은 서집사와 부엌일을 하는 사월이, 그리고 해남에서 온 상희란 아가씨가 있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방안은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은 상태로 사고 이후 보전돼 오고 있었다. 유씨 부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방안 물건들은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내고 있었다. 장롱과 문갑, 서안과 수틀, 한쪽에 놓인 사대부가 여인이 읽어야 하는 <여논어(女論語)>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주검 역시 잠을 자듯 반듯하게 누운 그대로였고 고통을 느꼈다거나 반항한 흔적도 없었고 제3의 인물이 침입한 정황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유서 내용 역시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했다. 남편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이 몰고 온 마음의 황폐함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유서를 펼쳐들었다.

<···사람의 명운이란 게 참으로 기묘한가 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인데도 눈 감으면 떠오르고, 달이 밝거나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멀리 떠난 님의 모습을 그리다 보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건 님께서 남긴 정 때문이라 봅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 하며 밤새 뒤척이다 선잠이 깼을 때 쓴 유언장 같았다. 검시기록을 펼쳐들자 발이 쳐진 안쪽으로 서과가 들어가 유씨 부인을 검험해 나갔다. 질문이 떨어졌다.

"은비녀를 입에 넣어라."
서과는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어떠냐?"
"약간 검습니다."

"입안을 살펴라."
"입안 역시 검고 혀가 약간 문드러진 상탭니다."
"손톱은 어떠냐?"

"푸른 기운이 있습니다. 그리고··· 검지에도 검은 빛이 돌고 있습니다."
"흐음, 그것만으로도 중독이다. 처음 이곳에 온 관원들은 방안 물건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으니 당연히 사건이 일어난 처음의 상태일 것이다."

주위를 살폈으나 자리끼의 물 외에 특별한 건 발견되지 않고 서안 위도 깨끗한데다 외부인이 출입한 흔적이 없었다.

"남편의 뒤를 따라 자식까지 갔으니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꺾인 건 어쩔 수 없다. 한데, 유서 내용이 감상적인데다 부인의 수결이 없으니···."

이상하게 생각되는 건 그 외에 또 있다. 중독의 경우 혀의 색깔이 검게 변하고 손톱이 푸른빛을 띠는 건 당연했으나 유독 검지 끝과 혀의 중앙에 검은 빛이 도드라진 게 마음에 걸렸다. 검험을 마치고 검시기록을 작성한 후 서집사를 불렀다.

"잠시 전에 해남에서 온 상희 아가씨라 했는데, 그 사람은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이 댁 도련님은 해남으로 가던 길에 주막에서 목숨을 버렸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 예에. 그렇습니다."

서집사는 집안에 얽힌 얘길 끄집어냈다.

"해남엔 최두호 선비님이 살고 있습니다. 시가문학(詩歌文學)으로 이름을 떨친 그분과 주인어른과는 막역한 사이로 한 스승 밑에서 공부한 인연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 과시에 급제해 벼슬을 살 적에 그런 말씀을 나누셨답니다. 장차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자식을 서로 교환해 1년씩 데리고 있자는 약조를 했답니다. 성격이 대쪽같은 최 선비님은 그 후 죄를 얻어 해남으로 귀양살일 갔는데 신원된 후에도 그곳에 눌러앉으셨답니다. 뜬 구름 같은 약조는 마침내 이루어져, 해남에서 최두호 선비님의 따님 상희 아가씨가 오고, 이댁에서도 윤호 도련님이 그곳으로 떠났지요. 한데···."

"가는 도중 독충에 물려 이 댁 도련님이 세상을 떠났군요."
"그렇습니다."
"상희 아가씨는 어디 있습니까?"

"가까운 암자에 불공드리러 올라가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셨는지 얼굴이 반쪽이 돼 있습니다."
"부인의 주검은 관아로 옮길 것이오. 상희 아가씨를 비롯해 집안의 어느 누구도 이 방에 들어가선 안 되며 식구들도 문 밖 출입을 삼가십시오."

"불공드리는 것은···."
"그것도 금해 주십시오."

정약용은 주위를 단속하고 관아로 돌아왔다. 이번 사건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을 보고한 지 한 시각이 됐을 때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집안 살림을 도맡은 서집사였다. 그가 심상치 않는 얘길 꺼냈다.

"···그 일이 이번 사건과 관계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꿈자리가 사납고 주인어른의 모습이 꿈길에 보이니 참고가 될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서집사는 주섬주섬 얘길 꺼냈다. 아마 십 수년 전쯤의 일이라 했다. 벼슬길에 나서기 전인데다 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할 때인데 주인인 김성겸과 최두호가 남산에서 시회(詩會)를 즐기다 내려올 무렵이었다.

두 사람의 걸음은 수표교에 이르러 각자의 집을 향해 나뉘어졌다. 취기가 남은 김성겸의 걸음을 붙잡은 건 여인의 비명소리였다. 기생으로 뵈는 처자가 인근 불량배에게 놀림을 당한 듯 잔뜩 웅크린 채 돌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 서방님께서 처자를 구해줬습니다만, 그게 악연이었지요. 공부는 마다하고 하루도 거름없이 찾아가 치마폭에 묻혔으니 노마님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답니다. 그 처자가 양가집 규수가 아니라 본색이 기생이었으니 저를 앞세워 힘께나 쓰는 장정 다섯을 딸려 보내 그 처자를 잡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요?"
"광에 가두고 노마님이 다그쳤습니다. 서방님 곁을 떠나 멀리 가겠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죽겠느냐 물으셨지요. 그 기생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곳에서 죽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엔 서방님의 씨가 자라고 있으니 함께 죽어 이 집안에 눌러 있겠다는 독설을 거침없이 하는 바람에 오히려 노마님이 병이 나신 것이지요."

서집사는 당시 상황이 생각난 탓에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저었다. 노마님의 걱정은 태산이었다. 아들의 씨를 뱃속에 담은 기생과 혼처도 정하지 않은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이었다. 그러다가 결정을 내렸다. 어느 누구도 모르게 감쪽같이 죽여 없앨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객을 사들여 기생을 죽이려 했는데 이미 그녀는 광에서 탈출해 모습을 감춘 후였다. 서집사는 이에 대해,

"그 기생을 광에서 빼준 건 서방님이셨어요. 어디로든 멀리 가 살고 있으면 언제건 기회를 봐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처자는 서방님 말씀에 마음을 돌려 떠난 것이지요.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좋은 일을 볼 게 없었으니까요. 저 역시 피를 보지 않고 일이 해결됐으니 그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했거든요."

서집사는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직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들 앞길을 기생이 막아섰다면 사대부 집안에서 어찌할 것인가. 두 번 물어볼 필요 없이 피 튀기는 결말을 냈을 것이다. 그러기에 한 걸음 빨리 김성겸이 손을 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얘기를 마친 서집사가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다 돌아가자 시체안치실로 옮겨진 유씨 부인의 주검을 놓고 서과는 뜻밖의 질문을 던져 정약용을 긴장시켰다.

[주]
∎염승(厭勝) ;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비방
∎수결(手決) ; 일종의 사인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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