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66회)

회색지대(灰色地帶) <1>

등록 2010.08.20 10:26수정 2010.08.2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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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만 조선시대 한양엔 게토(ghetto)가 있었다. 게토란 특별한 목적을 수행하려는 치외법권 지역으로 한양 양반들은 북촌에, 가난뱅이는 남촌에 일정한 구획을 그어놓고 산다. 양반을 비롯해 중인들의 거주지 또는 상인의 거주지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횡포를 미워해 수원성을 축조하려는 계획을 세워 천도하려 했던 건, 양반이라 부르는 사대부들의 전횡과 4백년을 이어 내려온 노른자위를 노릴 수 있는 기득권을 내세운 데다 왕실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파당을 지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 대로 특별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른바 게토다. 이 말은 미국의 흑인 빈민구역이나 유대인의 거리 등을 지칭하는 말이듯 한양에도 특정부류의 인간들만 머무를 수 있는 지역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잘난 양반인가? 아니다. 그들이 무리를 이뤄 사는 건 거주민의 취향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양반이나 상놈이 아닌 '반인(泮人)'이었다.  조선왕조의 유학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옆에 자릴 잡은 탓에 그들이 머문 곳을 반촌(泮村)이라 부른 건 성균관 주위 마을이란 말이다.

천자의 나라에선 사방이 물에 둘러싸인 이른바 큰 연못 속에 건물을 지어 벽옹(辟雍)이라 불렀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동서남북에 놓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런가하면 제후의 나라에 세운 학교를 반궁(泮宮)이라 했는데 벽옹과는 달리 건물을 지을 때 동쪽과 서쪽 문을 연결하는 부분만 물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곳은 연못이 반달 모양이니 벽옹의 반 정도 밖엔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 물을 '반수(泮水)'라 했으며 그러한 명칭 때문에 반궁이란 말이 생겨났다.

정조는 경모궁(景慕宮) 가까이 못을 파고 조그만 다리를 놓았는데 응란교(凝鸞橋)다. 이 응란교 이북이 반촌인데 성균관 유생이 쓴 <반궁잡영(泮宮雜詠)>엔 2백 여수의 시가 전하는 내용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하마비 남쪽에 길 하나 가로로 뚫렸으니
반촌 경계는 여기가 분명하다
지금 돌을 세워 표시한 곳이 어디인가
경모궁 연꽃가 연꽃 핀 곳이네


예전엔 관현(館峴)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을 경계로 삼았는데 정조 임금이 경모궁 앞 연지(蓮池)에 돌을 세우고 반촌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 성균관에서 경모궁 방향으로 내려오는 시내를 향하는 길을 볼 때 오른쪽이 동반촌, 왼쪽이 서반촌이다.

바로 이곳, 응란교 다리 아래서 사내의 주검이 발견됐다. 현장에 나간 사헌부 서리배들은 주검을 다리 위로 올리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역에 금줄을 쳐 행인이 가까이 오는 걸 차단했다. 도승지가 보낸 서찰이 머리 한 귀퉁이에 남아 있던 정약용은 응란교로 나아가 죽은 자의 신원파악에 들어가다 눈을 크게 떴다.


"이 자는 도승지 댁에 있던 사사가 아닌가. 집안이 적몰 돼 안방마님은 자진했고 자식들은 노비로 끌려갔단 말을 들었다. 그 집의 종 사사는 서대문 관아 관노(官奴)가 됐다는데 무슨 이유로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인가?"

검안을 하던 서과가 입술을 뾰쪽이 내밀며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몽둥이 등의 타물에 의한 상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뾰쪽한 날붙이에 대한 상흔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심해 볼 수 있는 게 독이다. 얼마 전 일어난 도화서 화원 서명하처럼 금잠(金蠶) 같은 독을 썼다면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을 터지만 서과가 고개를 저은 건 은비녀를 입에 넣었을 때 별다른 변화가 묻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상한 일이다. 어떤 독이기에 사람을 감쪽같이 해칠 수 있는가. 은비녀에도 묻어나지 않을 독이?'

서과는 다시 한 번 독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 듣고 교육 받았지만 구할 수 없었던 게 단장초라는 야갈(野葛)의 독이다. 그러나 이 독은 독성이 강해 눈동자가 터지는 등 몸에 작은 포진이 일어난다.

포진이라고 했을 때 포(皰)는 농익은 종기가 아니라 반쯤 진행된 걸 의미한다. 포진의 색깔은 청흑색으로 점차 입술이 터지고 혓바늘이 돋는 것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 사체는 달랐다.

이 사이엔 종류를 알 수 없는 풀 조각이 있었지만 근처에 은비녀를 댔을 때 별다른 변화가 없어 독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사체 주위에 금줄을 치고 사사의 사고 소식을 서대문 관아에 알리는 한편 동서 반촌 일대를 돌며 탐문에 들어갔다.

반인들은 띄엄띄엄 볼 뿐이었다. 그들이라고 귀가 없고 눈이 없겠는가. 사사의 죽음이 깊숙한 동네 곳곳에 소문이 돌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곧추세웠다.

이곳 응란교는 동반촌과 서반촌의 경계기 때문에 사사가 어느 곳을 다녀왔는지도 분명하지 않아 탐문할 범위까지 넓어 곤욕이었다. 서과가 한 마디 흘렸다.

"나으리, 도검이나 몽둥이 등의 타물에 의한 상흔이 없으니 독극을 먹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은비녀를 넣었어도 색이 변하지 않으니 묘한 일입니다."

"관아에 돌아가면 <독약사문(毒藥死門)>을 살펴 보거라."
"독약사문?"

"독을 먹고 죽었다고 다 같은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독을 먹고 죽은 경우 조각수를 사용해 입을 씻어내지 않더냐. 그런 연후에 죽은 사람의 입안과 목구멍에 은비녀를 집어넣고 종이로 밀봉했다가 일각 어림이 지나 꺼내보면 알 수 있다."

"독극이 직접 나타나는지요?"
"은비녀가 청흑색이면 다시 조각수로 씻어내는데 색깔이 지워지지 않아야 독사(毒死)다. 만약 독의 기운이 없다면···."

"당연히 선명한 흰색이 되겠지요."
"그렇다. 허나, 독을 알아내는 데 그 같은 방법만 있겠느냐."

정약용이 슬쩍 말 꼬릴 돌린 건 백반(白飯)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백반 한 덩이를 죽은 사람 입에 집어넣고 종이로 덮어 한두 시간이 지난 뒤 밥을 꺼내 그것을 닭에게 준다. 닭이 죽으면 당연히 독사다.

곡도(穀道)라 부르는 항문에 대한 조사는 스스로 독을 먹거나 중독된 경우에 행하는 데, 살아있을 때 음식물을 먹었다면 독기가 창자 안에 들어가니 증거나 나타나지 않을 것이나 항문을 검사해보면 색깔이 나타난다.

생전에 중독된 사람은 온 몸이 청흑색이 되고 시일이 많이 지나면 피육은 그대로지만 뼈는 문드러지고 검은 색으로 변한다.

새로운 소식이 나타난 건 서대문 관아에서 사령이 당도하면서였다. 사사는 하루 전에 문서를 정리하는 서령사(書令士)의 심부름으로 반촌에 나갔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부름 온 사령에게 정약용이 묻는다.

"관노들은 혼자서 돌아다닐 수 없거늘, 일개 노복(奴僕)이 누굴 만났는가?"
"서령사 얘기론, 동반촌 출신 채직동(蔡直童)을 만나기 위해서랍니다."
"채직동?"

되 묻고 나서 정약용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 역시 오랫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기에 직동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성균관이라는 곳. 여기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명륜당 외에 많은 건물이 있었다. 거기다가 동과 서로 나뉜 기숙사가 있었으니 건물을 관리하고 학생들의 식사 준비로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들은 각자 맡은 바가 다르지만 반인들이 세습적으로 맡았다. 반촌에 사는 사내가 성균관에 소속된 계집종과 관계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는 성균관의 재직인 직동이 된다.

재직은 장성하면 성균관의 기숙사에 소속돼 유생들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나중엔 제향과 관련된 육체노동을 맡는 수복이 된다.

그것과는 달리 반촌 사람이 성균관 밖의 계집종과 관계해 낳은 자식은 당연히 성균관의 서리가 된다. 어쨌든 반인(泮人)들은 사회적 신분은 지극히 낮았지만 그에 대해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성균관 유생들과 공적인 관계를 유지한 반인들. 반촌(泮村)은 성균관 유생들의 하숙촌인가 하면 과시가 있을 때엔 과거를 보는 자들이 주인을 정해 머무르는 일종의 여관 촌이었다.
정약용은 반촌에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정조 11년인 1787년(丁未년) 시월에 있었던 이승훈과의 천주교 학습사건이었다. 시월의 그날 정약용은 이승훈, 강리원(姜履元) 등과 과거공부를 핑계대고 반인 김석태(金石太) 집에 모여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다 이기경(李基慶)에게 발각돼 천주교 서적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빼앗긴다. 이 사건은 천주교사에 널리 알려졌는데 흥미로운 점은 후일 다산문집에 김석태의 제문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에 통하고 지극한 정은 땅까지 통했네. 깬 것도 나를 위해 깨고 잔 것도 나를 위해 잤었네. 가정에 소홀하면서도 나를 위해서는 치밀하였고 달리고 쫓는 일엔 동작이 느렸으나 나를 위해서는 빨랐네. 나의 잘못을 남이 지적하면 칼을 뽑아 성 내었고 사람이 나와 잘 지내면 그를 위해 온 힘을 다 쓰더니 혼마저 천천이 감돌며 아직 내 곁에 있네. 구원(九原)이 비록 멀다고 하나 앞으로 서로 생각하리.>

정약용에겐 아픈 추억이 있었지만 사사가 반촌에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채씨 성의 직동에게 무슨 볼일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서대문 관아의 사령이 뜻밖의 말을 하여 주위 사람을 긴장시켰다.

"사사는 금살도감(禁殺都監) 때문에 왔답니다."
"무어라, 금살도감?"

이 관청은 고려조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소의 도살을 막았던 곳이다. 태종 11년엔 소를 전문적으로 도살하는 자를 신백정(新白丁)이라 하여 90리 밖으로 내쫓았고 세종 7년에는 밀도살된 쇠고기를 사 먹는 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가 늘어났다.

그런다고 해서 양반들이 고기를 안 먹겠는가. 쇠고기를 식용으로 금하는 법령은 어느 누가 들어도 헛웃음이 쏟아질 일이었다.

[주]
∎서령사(書令士) ; 관아에서 문서를 정리하는 사람
∎금살도감(禁殺都監) ; 소나 말의 도살을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청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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