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전 김태호(48) 국무총리 후보자와 신재민(52) 문화체육관광부·이재훈(55)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잇따라 사퇴하면서 치열했던 '8·8 개각전(戰)'은 야당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한나라당은 이를 "고뇌 어린 선택으로 이해한다"(안형환 대변인)고 평가했다. 하지만 세 후보자의 사의 표명은 자진 사퇴보다 야당과 한나라당 일부, 국민 여론의 압력에 밀린 '낙마'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8·8 개각'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5일 집권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처음 내놓은 인사 개편안이 실패함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40대 김태호 후보자를 총리로 지명하며 "농민 출신 전 도지사를 내세워 소통과 통합의 젊은 내각을 만들고,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노선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청와대는 김 후보자를 포함한 3기 내각 후보자들이 "깨끗하고 청렴한 공직상을 정립하기 위한 도덕성 높은 인사들"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대통령이 김 후보자를 총리로 지명한 데는 다른 뜻도 있었다. 그는 총리 후보자 지명 일주일 뒤 열린 '8·15 행사'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집권 후반기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공정한 룰에 따라 경쟁하고, 능력에 따라 신분상승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김 후보자는 겉으로는 공정한 사회를 내세운 이 대통령의 입맛에 딱 맞아 떨어진 인물이었다. 김 후보자가 총리 지명 직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소장수 아들이 총리가 되면 20~30대와 서민, 농민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고 화답한 것도 이 대통령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 2인자'를 꿈꾸던 가난한 소장수 아들은 불과 21일 만에 만신창이로 쫓겨가게 됐다. 인사청문회에서 드러난 김 후보자의 과거 언행은 서민이나 공정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191만원짜리 루이뷔통 가방을 "고생하는 아내에게 선물로 줬다"면서도 언제 어디서 샀는지도 몰랐던 김 후보자의 답변은 되레 서민들의 자괴감을 들게 했다. 하루 숙박비 93만원에 달하는 고급 호텔에 투숙하면서 "도지사가 여관에서 잘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항변했던 점도 마찬가지다.
그의 대답은 '찜질방 도지사'(이광재)와 대비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받아야만 했다. "박연차 회장을 모른다"던 김 후보자의 반복된 거짓말이 <오마이뉴스>에 첫 보도된 박 회장과의 '건배 사진'으로 들통나자 국민들은 더 이상 그를 믿을 수 없게 됐다.
김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그를 '공정한 사회'의 아이콘으로 만들려던 이 대통령의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동안 청와대는 목도리와 어묵, 눈물과 국밥 등 '친서민 쇼(show)' 연출에 능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는 농민 출신 40대 총리를 앞세워 집권 후반기 친서민 이미지를 강화하려다가 오히려 타격만 입게 됐다. '소장수 아들'을 내세운 '쇼(show)장수 MB'의 단막극은 비극으로 끝난 셈이다.
'8·8 개각 실패' 비극의 시작일 뿐, 여론 못돌리면 레임덕 가속
하지만 문제는 이 비극이 '1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집권 후반기를 이끌 '내각의 수장'을 잃어버린 청와대는 당장 29일부터 차기 총리와 장관 후보 인선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고·소·영'-'강·부·자'로 통칭되는 이명박 정권의 인재 풀을 감안하면 친서민, 공정한 사회 기조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위장취업과 부동산 투기 등 공직후보자들의 비위로 악화된 국민 여론을 달랠 해법 찾기도 큰 숙제다. 청와대가 곧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8·8 개각 실패로 타격을 입은 친서민 이미지의 회복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느끼는 8·8 개각 실패의 '한기(寒氣)'는 더 크다. 애초 한나라당은 김 후보자를 임명하려는 청와대의 뜻을 그대로 받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난 24~25일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악화된 국민 여론을 체감한 한나라당은 집단 반발하기 시작했다. 당내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2012년 대선은커녕 총선도 못 이긴다", "7·28 재보궐 승리를 청와대가 다 까먹었다"는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8·8 개각 실패에 대한 여당의 건의를 청와대가 수용하고 김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면서 모양새를 갖춘 수습은 끝났지만, 체감 여론은 여전히 추운 게 현실이다. 한나라당 주류는 김 후보자가 사퇴하면서, 오히려 이 대통령의 결단이 높이 평가 받는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잃을 것은 다 잃었다"는 게 여의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나라당 일각에서 민정수석실의 인사검증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희생양' 없이는 돌아선 민심을 되돌릴 수 없다는 판단이다. 만약 청와대가 8·8 개각 실패로 터진 불만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면, '당·청' 신뢰는 계속 금이 가게 되고 결국 MB의 레임덕이 가속화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번 일로 유력한 대권주자 한 사람을 잃게 되는 손실도 입었다. 범여권에서는 김 후보자가 40대 총리로 무난히 임기를 마칠 경우,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친박계 내에서도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부적절한 처신으로 인해 김 후보자는 당분간 재기하기 힘든 상처를 받게 됐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8·8 인사청문회 최대 수혜자 중 한 사람은 박근혜"라는 농담도 나온다.
야당 "조현오도 사퇴"- 여당 "다른 후보는 안돼"... 후폭풍 계속
이날 김 후보자와 장관 2명의 사퇴로 8·8 개각 후폭풍은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6·2 지방선거 이후 또 다시 정국 주도권을 쥐는 성과를 얻게 됐다.
기회를 잡은 야당은 청와대와 한나라당을 더 거세게 몰아칠 준비를 하고 있다. 총리와 장관 등 3명의 후보자가 낙마했지만, 야당은 "2%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나머지 인사청문 대상자 7명 중 부적절한 인사가 더 있다는 것이다. 야당이 꼽는 다음번 사퇴의 1순위는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전직 대통령을 모독하고 음해해 국민의 공분을 사고,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저버린 인물"이라며 조 후보자의 사퇴를 거듭 요구했다. 이용경 창조한국당 원내대표도 "경찰의 수장으로서 권위를 상실한 지 오래"라며 힘을 보탰다. 야당 소속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들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장관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치권, 여당과 야당의 시각차가 커 8·8 개각 후폭풍은 계속되고 있다.
박지원 민주당 비대위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국민 여론을 보고 대통령이 바람직하게 판단할 것이다, 친서민에 반하는 인사는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낙마한 3명 외에 조 후보자 등 추가로 청와대가 지명 철회를 해야 한다는 간접 압박인 셈이다.
그러나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김 후보자 등의 사퇴가 고위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면서도 "야당은 더 이상 다른 후보자들을 공격해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손상을 입히려는 정치적 계산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방어막을 쳤다.
청와대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대통령은 이날 김태호·신재민·이재훈 후보자의 사의 표명을 받아들이면서도 "모두가 능력과 경력을 갖춘 사람들인데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가 나서서 나머지 문제되는 후보자들의 지명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따라서 여야와 청와대의 기싸움은 다음주까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공유하기
'소장수 아들' 내세운 '쇼장수 MB'의 비극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