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흔히 구이저우를 말할 때 가장 앞세우는 숫자는 단연코 '셋'입니다. 하늘은 사흘 맑은 날이 없고, 땅은 세 평 남짓한 평평한 자리가 없으며, 이렇다 보니 주머니에는 서푼 조차 없다(天無三日晴 地無三里平 人無三分錢)고 전해옵니다. 또한 오리를 벗어나면 풍습이 다르고 십리를 벗어나면 삶이 다르다고 합니다.(五里不同風 十里不同俗) 구이저우에서는 17개의 소수민족이 저 마다의 고유한 풍습을 이어가며 근대도시의 모습과는 조금 동떨어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먀오주(苗族)', '동주(侗族)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먀오주의 조상은 '치우천왕(蚩尤天王)'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네들은 치우천왕이 황하주(黃華族)의 황제와 싸움이 일었는데, 어떠한 경유로 그 싸움이 끝난 뒤 남으로 내려와 깊은 산골에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네들은 '치우천왕'을 여전히 높이 모시고 있습니다. 잊혀진 영웅이 아닌, 언젠가는 다시 나라를 일으킬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채로운 전통 의상은 구이저우 내에서 천 여 가지의 색으로 표현되었다고 하니,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라 하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순박한 민족을 보면, 과연 경제적 가치, 물질적 척도가 행복의 필수 조건인 비례관계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 묻게 만듭니다.
저는 앞서 한 번 다녀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두 번째 길(2008년 4월 중 여행)이어서인지. 가슴에는 자만심과 건방짐이 저보다 먼저 나서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발걸음은 가볍고, 길을 나서기 앞서 어디로 가야 할지 두리번거리지 않으며, 사람에게 묻지도 않은 채 홀로 걷곤 합니다. 길을 걱정되지 않으나 하루에 한 번 꼴로 비가 내리고 있으며, 제가 소수민족의 마을로 나들이 가면 그네들은 농사일 하러 논 밭에 나가 무척이나 조용하며, 조그마한 도시는 근대도시로 이미 편입되어 한주(漢族)와 별반 다름없는 삶을 꾸려 가는 듯합니다. 내가 그린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
처음 여행을 준비하며(배를 타고, 기차를 따라 내려올 때 까지) 소수민족의 삶을 보며 그네들의 전통 속에서 '오래된 미래'의 원형을 찾겠다고 다부지게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열흘이 지날 즈음, 처음 먹었던 마음에 회의가 일며, 이 여행을 계속 해야 될지 고민이 하루에 열두 번 저에게 다가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왜 여행을 하는지?', '여행이 무엇인지', '어떤 목적 의식에 길을 걷고 있는 건 아닌지', 그는 내게 물어옵니다. 소수민족의 오지를 걷고 있으면서, 그네들의 일상 풍경을 담지 못하고, 어떠한 말 한 마디 건내지 못하고, 소읍에서 잠시 길을 걷다 근대 도시와 다르지 않은 시멘트 건물에 상점이 놓여져 있다며, 버스에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전 저에게 묻습니다. 정말 여행을 계속해야 하는지…. 이런 반복과 회의 속에서도 처음 길을 나선 이유가 아직 생생하게 숨쉬고 있습니다. 카이리로 들어서 배낭을 풀고 주변의 소수민족 마실을 다녀볼까 합니다. 카이리는 구이저우에서 구이양(貴陽) 다음의 도시이면서 다양한 소수민족을 접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사흘 뒤에 있을 스동(施洞)의 축제 때문에, 잠시 회의를 꿀꺽하고 집어 삼킵니다.
구이양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카이리는 근대도시의 모델이지만, 첸동남지역으로 들어온 저는 문화적 충격에 잠시 휘청거렸습니다. 롱장의 장날(일요일, 구이저우의 최대 시골장)풍경은 소수민족의 장터이며, 장을 보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오는데 반해, 카이리에서는 모두가 짧은 옷에 화려한 색감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있으며, 건물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건물 안에는 형형색색의 물건이 진열되어 있으며, 핸드폰은 놀라움입니다. 소수민족의 옷은 멀리서 보면 하나 같이 단순하고 한가지 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끝 마디마디에 자기만의 색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현대 옷은 대량 생산으로 인해 원색이 다채롭지만 세세하지 못합니다. 정성스러움을 다한다면 소수민족의 옷이 오래도 눈에 안겨 오며 그 아름다움이 눈에 하늘하늘거릴 것입니다.
휘청거리는 오후를 카이리에서 보내며, 엽서를 씁니다. 근대도시의 모습에서 문화적 충격을 접했다고, 물질문명의 세상으로 들어왔다고... 우체국에 들러 엽서를 부치고서는 하루 종일 달려온 길 위에서, 너무 다른 서로의 세계에서 왼발을 오른발로 옮겨놓습니다.
어머님, 카이리에서 약17km 떨어진 마탕(麻塘) 마을을 찾았습니다. 이곳에는 혁가런(革家人)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사는데, 도시에서 가깝고 낯선 소수민족으로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제가 마을로 걸어 들어가니, 이미 공터에 전세 버스가 들어와 있으며 마을 뒤편에서는 음악소리가 흘러 내려왔습니다.
구이저우의 소수민족을 찾아 다니다 보면, 이런 모습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구이저우는 관광지가 아닌 오랜 삶이 지속되는 터전이기에, 배낭여행객이 뜸하면서 다른 한편 나이 많으신 서양 관광객들이 넘쳐 납니다. 서로 다름에서 오는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감탄인지 모르나, 그네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공연을 보고서는 길을 나서곤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연을 하며, 그 공연이 끝나면 장신구를 팔며 서양관광객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가 소리에 이끌려 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니, 예의 혁가런의 아주머니와 할머니께서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계십니다. 이 전통의상은 일상 생활 입고 다니기에는 조금 불편할 만큼 장식이 요란합니다. 나이 많으신 서양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는데, 공연이 끝나자 상황이 바뀌어 할머니들께서 장신구 하나 더 팔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가무(歌舞)는 그네들의 장신구를 하나 더 팔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양 관광객이 빠져나간 그 공터에서 홀로 서성이며 슬픈 역사를 그려봅니다. 100년 전에는 그네들끼리 살아가며, 여느날에는 축제를 즐겼을 터인데, 오늘날에는 억지스레 공연을 연출한다는 느낌입니다. 공연에는 분명 어떠한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공터를 맴돌고 있습니다. 물론 그네들에게 이 감정을 묻지 않아서 제 선입견일 수 있지만 왠지 슬퍼보입니다. 아래 무논에서는 아버지께서 소를 몰며 모내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탕 마을을 보고서는 음력 3월 15일 앞뒤로 마오주의 축제가 있음을 알리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열리는지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없어, 무작정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더랬습니다. 우선 '동네 이름' 하나 들고서는 버스를 확인한 다음, '스동(施洞)으로 간다'는 버스에 올라섭니다.
이곳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스동은 좁은 산길을 돌아 돌아 달려갑니다. 창 밖으로는 무논에 오리들이 헤엄을 치고, 산자락에는 나무집(弔脚樓)이, 어린아이들은 일주일째 빨지 않은 옷을 입고서는 뛰어 놀고 있습니다. 왠지 꾸질 꾸질한 시골 동네로 길을 나서는 듯합니다. 어쩜 제 유년 시절의 초상(肖像)입니다.
2010. 04.25 구이저우(貴州). 카이리(凱里市)에서
손 희 상 올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