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반핵항쟁 일지1990년 11월 3일 국내 조간신문에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에 대한 보도가 이어져 5일동안 전쟁터를 방불케 할정도의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정대희
1990년 11월 3일 오전. 이 같은 소식이 안면도 일대에 삽시간에 퍼지자 주민들은 비교적 믿을 만한 출향인을 대상으로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에 나섰고 '안면도=핵기물처리장 설치'의 기정사실화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충남도는 "당국과 협의 사실 없다"고 부인한다.
이튿날 재차 핵폐기물처리장이 안면도에 건설될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주민들은 앞서 언론발표에 성명서를 내고 반대운동에 들어간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과 함께 안면도 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반핵항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11월 5일 대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한 핵폐기물처분장 결사반대 투쟁위원회로 조직을 확대한다.
이처럼 첫 반핵모임이 열린 후 불과 이틀 만에 제법 몸집이 큰 조직이 결성된 배경에는 1990년 11월 9일 열리는 원자력위원회에서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건설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핵항쟁이 펼쳐진 3일째 되는 5일. 주민 1000여 명은 주민동의 없는 핵폐기처리장 건설계획을 즉각 취소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며 안면읍 터미널에서 자연휴양림 조성공사 현장인 조개산까지 약 3km의 가두시위를 벌였다.
또 안면읍 이장단 28명과 고남면 이장단 14명, 새마을지도자 등이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뿐만 아니라, 안면읍사무소와 고남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직원들도 가슴에 '웬말이냐 핵폐기장'이란 문구가 적힌 검은색 리본을 달고 반핵항쟁에 동참해, 인구주택총조사 등 일반 업무가 마비됐다.
4일째인 6일에는 안면도내 17개 초·중·고교생의 45%에 해당하는 1500여 명이 등교를 거부한 채 반대운동에 동참했는데 이중 안면고의 경우 전체 670명의 학생이 모두 시위에 참여했다.
사실상 첫 집회이기도 했던 이날 '안면도 핵폐기물처리장 결사 저지대회'에 참여한 주민은 5000여 명. 이들은 안면읍 터미널에서 집회시위를 열고 연륙교까지 약 10km 구간에 걸쳐 가두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연륙교에서 전투경찰 5개 중대 1000여 명이 방패를 들고 최루탄을 발사해 시위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날 집회는 투쟁위원장이 정근모 과기처장관과의 전화통화 끝에 당일 KBS <뉴스9>에 핵폐기물처리장 백지화를 언급하는 것을 약속하면서 해산되었다. 허나 당일 정근모 장관이 "안면도의 서해과학산업연구단지에 들어설 원자력 제2연구소는 핵폐기물처분장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주민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특히 앞서 열린 시위현장에서 지역 국회의원인 박태권 의원(민자당)이 연설을 통해 핵폐기물처리장 설치가 아닌 과기처가 발표한 '서해과학연구단지'라고 주장하며 주민들을 설득하려 하다가 격분한 주민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다.
5일째인 11월 7일. 투쟁위 지도부가 정근모 과기처 장관과 심대평 충남지사 면담을 떠나 서해연구단지 조성계획 발표는 핵폐기장 건설을 위한 은폐행위라고 지적하고 반대의사를 밝혔다.
이에 과기처는 투쟁위 지도부에 끝내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사실을 시인하였으나 그 책임을 충남도에 떠넘긴다. 그러나 충남도는 여전히 종전과 같은 대덕단지와 비슷한 연구시설을 유치하는 것이라고 투쟁위 지도부를 설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