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작업, 문틀과 벽지를 제거한 뒤의 모습, 마지막으로 한 장 남은 벽지를 걷어내면 안방에서 화장실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김수복
새마을 운동 이후 어머니의 삶은 돈과의 투쟁어머니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하자면 '돈과의 투쟁'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것도 무슨 거창한 투쟁의식이나 원한의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투쟁의 방식 가운데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비폭력 무저항'의 투쟁이었다. 도둑질이나 강도를 모의하고 사주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기를 당하고도 "그 사람도 얼매나 폭폭했으면 나 같은 사람을 다 속였겠소"하는 식으로 오히려 사기꾼의 고개를 못 들게 하는 방식의 투쟁을 어머니는 참으로 오래도록 끌어왔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로 요약되는 새마을 운동 이후 불어닥친 이상한 열풍 속에서 우리의 살림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아버지는 무슨 영광을 보자는 것인지 마을 이장을 20년 가까이나 하시면서 집안일은 거의 외면한 채 살림을 축냈다. 다른 사람은 마을 이장 하면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해마다 논을 넘겨주고 밭을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미래는 내 것이라는 듯 공무원들을 집으로 데려다가 닭을 잡고 오리를 잡았다. 그 닭이며 오리들은 어머니가 애써 키우신 것들이었다.
회고하면 새마을 운동 이전의 아버지는 모범적인 가장이었던 것 같다. 겨울에는 뒷방에서 어머니와 함께 가마니를 짜고 멍석을 엮었으며, 그러면서도 틈틈이 마을 아이들의 한문 공부를 지도하기도 했다. 부부의 금실은 뭐라고나 할까, 가끔 티격태격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보기에 적당히 좋을 정도였다. 밥을 지을 때면 항상 아버지가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훌륭했다고 여겨진다. 하긴 어머니의 연세 40대 중반에 막내를 보기도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아무튼 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어머니에게 고난의 시작이었다. 거의 매일 찾아오는 새마을운동 담당 공무원들을 상대하느라 아버지는 점점 손님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그렇다고 이장에게 무슨 정해진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락 때 나락 한 말, 보리 때 보리 한 말이라는 정해진 보수가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나 모두 그 정해진 보수를 받아내는 재주는 없었다. 자발적으로 가져오면 받고 안 가져오면 잊어 버리는 식이었다. 마을이 워낙 소농 위주인데다 그것마저 소작농이 태반이다 보니 애써 달라고 하기도 사실은 계면쩍은 일이었을 것이다.
받아야 할 것을 달라고 하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결국 장사였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아이들의 학용품값이다 기성회비 같은 것들을 충당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농사일 틈틈이 광주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광주의 양동 도매시장에서 메리야스나 플라스틱 용기 같은 것들을 사서 머리에 이고 마을을 돌며 외상을 주고 추수 뒤에 받는 방식의 장사였다. 겨울이면 동상에 걸려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몸을 이끌고 다니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집안 어른들이 아버지를 크게 꾸짖고 나섰다.
"명색이 가장이라는 사내가 어째서 저리도 쯧쯧쯧, 자네 당장 그놈의 이장인지 된장인지 노릇 그만두게."집안 어른들 간에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이장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는 마을 사람 모두의 인감을 이장이 관리하던 시절이었다. 새로 이장을 맡은 사람이 마을 사람들의 인감을 도용해서 농협으로부터 거액의 대출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법원 집달관들의 딱지 세례를 받고서야 "어매 이것이 뭔 일이여" 했다. 밥짓는 솥에 붉은 딱지가 붙고, 쟁기질을 하는 소의 코뚜레와 멍에에도 딱지가 붙었다.
그토록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지만, 전임 이장은 1년 반 정도 감옥을 사는 것으로 대속이 되고 말았다. 돈은 이미 여지저기 흩어져 있는 자식들의 사업자금 등으로 다 소모되어 버린 탓이었다. 지금처럼 입금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압류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그런 시절이 아니었던 까닭에 농협의 빚은 모두 마을 사람들의 부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 3년이 채 안 돼 이장 자리는 다시 아버지 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장직에서 최종적으로 물러나던 무렵, 우리 집에는 단 한 마지기의 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가 유선방송 사업을 한다고 보증을 서 달라 하면 보증을 서 주고, 현금을 빌려 달라 하면 또 거절을 못하고 빌려주는 방식으로 아버지는 혼자만의 영웅이 되어갔다.
당시에는 나락 수매를 하면 현장에서 수매대금을 본인이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받고 나머지는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수령하는 제도가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까닭으로 이장이 일괄수령해서 본인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마치 당신 소유이기나 한 것처럼 누가 잠깐만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을 못하고 "그러세 그럼"하는 식으로 잘난 척은 혼자서 다하고 나중에 피해는 가족이 분담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그나마 충실(?)하게 수행하는 시기는 선거 기간 동안이었다. 선거 때만 되면 마당에 고무신이 몇 짐이나 쌓였고, 아버지의 주머니는, 가령 주머니가 열 개 달린 옷을 입고 있다면 열 개 모두 돈으로 가득했다. 그 많은 돈이 아버지의 기분에 따라 어떤 날은 어머니에게도 주어지고 아이들에게도 쓱, 쓱, 곶감이라도 빼주듯 빼주시는 거였다.
당시의 철없는 생각으로는 해마다 달마다 선거를 했으면 좋겠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은 흐르고 있었고, 아버지도 이제는 당신이 그동안 뭔가 거대한 거품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무 늦었던 것인가. 자발적으로 이장직을 내놓은 뒤로 아버지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폐인의 길을 걷게 됐다. 자식들 뒷바라지에도 숨이 가쁜 어머니가 이제는 '서방'이 여기저기에 깔아놓은 외상 술값을 갚으러 다녀야 하는 역할까지 떠안게 됐다.
그쯤되면 어머니의 언행이 몹시 거칠어질 법도 하건만 지금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어머니는 오히려 조용해져 갔다. 물건 값을 떼이고도 떼어먹은 사람을 욕하거나 저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이 "밥이나 제대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밭뙈기 장사들이 벌이는 사업장에 품팔이를 나갔다가 며칠씩의 품삯을 떼이고도 "나는 두 다리 뻗고 잠이라도 자지만" 하는 식으로 오히려 사기꾼들의 잠자리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바보스럽기 짝이없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내가 차츰 얻게 된 교훈은 뭐라고나 할까, 사람이 돈을 의지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나 할까, 그랬다. 그런 어떤 무언의 말씀이 어머니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장남 명색의 나는 어머니의 그 말씀들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받아 흡수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중증 치매라는 진단을 받기 전의 어머니께서는 가끔 "에미가 못나서 가난을 물려주고 말았다"고 서글픈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하시곤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으로는 가난이 아니었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은 백 번을 생각해도 가난이 아니었다.
진부한 것, 상투적인 것, 흔해빠진 것, 모두가 이러이러하니 나도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따위들을 거부하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릎 꿇거나 돌아서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정면 돌파하는 어떤 명징한 정신 같은 것이 어머니로부터 내게 전해졌다는 믿음이 있었다. 어머니가 만약에 돈놀이 같은 것이라도 해서 필요 이상의 많은 돈을 가진 부자였더라면, 그래서 미성년의 시기에 벌써 가난한 사람 알기를 영혼 없는 무슨 동물처럼 해 왔다면 내가 오늘날 이렇게 어머니의 곁에 머물고자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동생이 여럿이다 보니 여럿 가운데 한 녀석은 '부모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 있느냐'고 곧잘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녀석도 세상을 조금만 더 살아보면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지난 날에 했던 자신의 그 소리를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어떤 배경에 의해 운영되는 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그 꼬투리나마 붙잡게 되는 순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이 가난해도 정직하고 남을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좋은 것이로구나 하는 고도의 성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인들 모를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수십여 년 동안 축척된 이런 모든 그림들이 그리고 생각들이 지난 50여 일 동안 내 머릿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바람에 망치로 무릎을 때리고도 그리 아픈 줄을 몰랐고, 삽으로 발등을 찍어 놓고도 그 순간에만 이를 악물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신음소리를 냈을 뿐 이내 잊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외벽을 끝내고 방에 보일러를 깔고 미장을 하고 도배를 하고 드디어 장벽을 걷어내기에 이르렀다. 내 방은 아직 손도 대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방은 근사하고 훌륭하게 완료, 완료가 된 것이다.